구약성경 공부/이사야서 공부

이사야서 33장 공부 ; 역경과 주님의 도우심

윤 베드로 2017. 4. 9. 07:40

구원을 비는 기도(33,1-6)

 

이 말씀은 앗시리아에게 주는 경고다.

앗시리아는 B.C.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을 정복했고,

      14년 후 히스기야 왕 때에 유다를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2열왕19장).

하느님은 유다의 죄를 책망하시기 위하여 앗시리아를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한 나라에 대해서도 조금도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실제로 앗시리아는 정복한 나라들의 반란을 예방하고

            또한 그들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하여 정복한 나라의 민족성 자체를 없애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한 나라들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通婚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근동 세계에서 앗시리아는 피정복민들에게 가장 잔인했다.

 

앗시리아는 사마리아를 정복한 후 예루살렘까지 정복하기 위하여 그 성을 포위했다.

그래서 유다는 앗시리아 진영에 사신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앗시리아의 목적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들의 범죄에 대하여 징계의 막대기로 앗시리아를 택하셨지만

                앗시리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율적이 되어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들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 같은 앗시리아의 포악함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네가 파괴를 끝내면 너 자신이 파괴되고

          네가 배신을 마치면 너 자신이 배신을 당하리라.(33:1)”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에게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다음으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범죄한 자기 백성들에게 학대자의 학대를 허용하심으로

                 어떻게 그들에 대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지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앗시리아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학대할지라도

               하느님은 그것을 섭리하심으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신 뜻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학대자의 손에서 구원하신다.

2절에서 유다는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고 하느님께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죄 가운데 살던 유다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신 뜻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적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33:3,4).

4-5절의 정의, 공정 등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한 말이다.

즉 하느님께서 시온에 계실 때 시온은 정의와 공정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예루살렘에는 평안이 있을 것이며 또한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다.

여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이다.

 

역경과 주님의 도우심(33,7-16)

 

33,7-9 :

예언자는 다시 주제를 바꾸어 유다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의

                비참한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평화의 사절들”은 앗시리아 군대를 말한다.

앗시리아 군대는 유다를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히스기야는 사신을 앗시리아 왕이 머물고 있는 라기스로 보내 그들과 화친하기를 청하였지만

                    앗시리아의 목적은 유다를 정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다의 제안을 거절했다(2열왕18장).

본문에서 이것을 “평화의 사절들이 슬피 운다”라는 말로 묘사 했다.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인하여 유다의 대로는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졌고,

                     성읍들은 파괴 되었으며, 유다인들은 앗시리아에 의하여 고통 받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유다가 당하게 될 총체적인 처참한 모습을 9절은 이렇게 묘사 하였다.

“땅은 슬퍼하며 생기를 잃어 가고 레바논은 부끄러워하며 메말라 간다.

사론은 사막처럼 되고 바산과 카르멜은 벌거숭이가 된다.”

 

33,10-13 :

10절, “나”라는 말이 거듭 세 번 언급 되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호칭하신 말로서 스스로 주관자가 되어

             자신의 뜻을 행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주는 말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상에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범죄함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욕되게 했다.

유다가 패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것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다.

하느님은 앗시리아를 치심으로 자신의 능하심을 나타내셨다.

 

33,14-16 :

앗시리아가 침략할 때 유다 중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 것이지만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의를 행하는 자는 오히려 높은 곳에 살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보장이 되시고

                또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임금이 되실 때(33,17-24)

 

예언자는 계속하여 하느님께서 유다를 회복 시켜 주셨을 때의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임금”과 “광활한 땅”이다.

여기 임금은 이스라엘의 목자를 상징하고, 땅은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삶인 평화는 언제나 왕(목자)과 땅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즉 선한 목자로서 왕이 존재하고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하는 땅이 존재할 때

              그들 가운데는 평화가 임한다는 의미다.

그날에는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뻔뻔스러운 민족(앗시리아)도 보지 못할 것이다(33;19).

또한 그 날에 예루살렘은 영영히 그 터를 굳게 할 것이고, 그 곳에 하느님께서 임재 해 계셔서,

친히 유다의 재판장과 왕이 되실 것이다(33,20-22).

 

23-24절은 유다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정리하여 말해 주고 있다.

즉 유다는 현재 마치 잘 정비 되지 않은 배와 같아서 원하는 곳으로 항해할 수 없다.

그러나 후일에 그 배가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게 될 때, 그 배는 많은 재물을 탈취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은 현재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은혜의 창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본다면 언제나 그곳에서 소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