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이사야서 공부

이사야서 30장 공부 ; 이집트의 도움은 헛되다

윤 베드로 2017. 4. 8. 07:48

이집트의 도움은 헛되다(30,1-7)

 

예언자는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유다를 “반항하는 자식”이라고 했다.

그는 유다가 어째서 반항한지 구체적으로 고발하였다.

그들은 계교를 베풀었지만 하느님께 묻지 않았고

             또한 그들은 맹약을 맺었지만 하느님이 아닌 애굽과 맺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애굽을 더 신뢰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와 같은 그들의 행위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죄악에 죄악을 더 할뿐이다”(1절)라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하느님 대신 애굽을 의지하였지만

             그들이 의지한 바로 그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할수록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의 제후들은 애굽과 동맹을 맺기 위하여 애굽의 소안과 하네스에 이르렀다.

그들은 강한 자로 간 것이 아니고 연약한 자로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그곳에 내려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그들은 애굽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와 달라고 탄원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원리는 언제나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도움을 구할 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어떤 결실도 얻지 못했고 오히려 수치만 당하였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을 의지할 때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6절, “네겝 들짐승들”이란 애굽을 상징하는 언어다.

애굽을 상징하는 짐승이 구체적으로 어떤 짐승인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일 강에 살고 있는 하마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물뱀이나 악어라고도 한다.

 

여기 사신은 유다가 애굽에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신을 말한다.

그들은 애굽의 호의를 사서 자신들을 돕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선물을 가지고 애굽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사막을 횡단하여 애굽에 갔다.

하느님은 유다에게 이런 불신앙적이고 어리석은 수고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유다가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한 결과는 무익한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애굽은 하느님 보시기에 “가만히 앉은 라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라합이란 “소란한 자” “교만한자”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은 라합”이란 애굽을 비꼬는 말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의미다.

유다가 이처럼 무기력한 애굽을 의지함으로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순종하지 않는 백성(30,8-14)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유다의 반항을 서판에 기록하여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고 명하셨다.

그곳에 기록해야 할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이자들은 선견자들에게 “계시를 보지 마시오.” 하고

                 예언자들에게 “우리에게 올바른 것은 예언하지 말고

                 솔깃한 말이나 하고 환상 같은 것들이나 예언해 주시오.

정도를 버리고 바른길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한 말은

            우리 앞에서 이제 그만 하시오.”하고 말하였다(30,10-11).

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듣고자 했다.

이것은 부패한 자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패한 자들은 진리보다는 언제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에 이끌린다는 의미다.

실제로 세속화된 사람들은 옳은 것보다는 좋은 것에 따라 살고 있다.

반항한 유다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파괴함 같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14절).

 

필사적인 도주(30,15-17)

 

하느님은 유다가 반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유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들에게 쫓기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구원의 길로 행치 않기 때문이다.

유다는 하느님께서 그들 앞에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도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그러나 그들을 좇는 자가

            더 빨랐기 때문에 그들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의 때(30,18-26)

 

여기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다리시며”라는 말은

          유다가 반항하여 넘어 졌을 때에도 하느님은 그들에 대하여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유다가 돌아온다면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30:19).

그리고 그들을 바른 길(正路)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유다가 돌아올 때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30:22).

하느님은 유다가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져 버릴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이것은 유다로부터 더러움을 없애 주실 것이라는 의미다.

하느님은 또한 유다가 회개할 때 풍성함을 약속해 주셨다.(30:23).

이처럼 하느님의 축복은 모든 것을 풍요롭게 한다.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30,27-33)

 

하느님께서 앗시리아를 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보라, 주님의 이름이 멀리서 오신다.

그분의 진노가 타올라 연기 자욱하고 그분의 입술은 분노로 가득하며

             그분의 혀는 집어삼키는 불과 같다.(30:27)”

본문은 하느님께서 앗시리아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묘사는 긴박감을 더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때 앗시리아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다른 민족들을 압제하며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은 앗시리아의 모습은 하느님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 언제나 범하는 일이다.

 

“그분의 입김은 목까지 차오르는 격류와 같다.

그분께서는 겨레들을 파멸의 체로 뒤흔드시며 민족들의 턱에 미혹의 재갈을 물리신다.(30:28)”

하느님의 진노 앞에 선 민족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마치 키 위에 있는 곡식들과 같아서 농부의 손에 의하여 그것들이 까불리는 것처럼

             하느님의 진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앗시리아가 주님이 진노의 손에 의하여 망하게 될 때 유다는 기뻐할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마치 절기를 지키는 밤처럼 노래를 부를 것이고

             저를 불며 야훼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의인들은 즐거워할 것이고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다(30:2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