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이사야서 공부

이사야서 3장 공부 ; 예루살렘과 유다의 난세

윤 베드로 2017. 3. 23. 08:12

예루살렘과 유다의 난세(3,1-12)

 

*예루살렘과 유다에서는 無法狀態가 판을 칠 것이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천한 자들이나 자격이 없는 엉뚱한 사람들까지도

                통치자로 추대될 것이다.

 

3,1-12 :

하느님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황폐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 주고 있다.

1절,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은

                 유다가 하느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일에 하느님을 의지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창고에 쌓아 둔 물질을 의지했다.

이것은 그들이 세속화되었음을 말해 준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님께 구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너희가 의지할 모든 것을,

                      저장된 모든 빵과 저장된 모든 물을 없애 버리시리라.

용사와 전사 재판관과 예언자 점쟁이와 원로

              장교와 귀족 고문관과 장인과 마술사를 없애 버리시리라.”(1-3절).

이 말씀은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할수록 궁핍해 진다는 것이다.

유다는 창고에 쌓아둔 물질을 의지함으로 물질적인 궁핍을 당할 것이다.

그들에게 양식이 없을 것이고 물을 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용사와 재판관과 예언자와 점쟁이와 원로와 장교 ...를 없애 버리시리라.”

여기 용사와 전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을 의미하고

        재판장과 예언자 점쟁이와 원로 등은 모두 정치 경제 사회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유다는 하느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유능한 지도자들을 신뢰했다.

그들은 유능한 지도자가 나라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들이 의지하던 이것들로 인하여 이들은 더욱 궁핍해 질뿐이었다.

 

4절, “그런 다음 나는 풋내기들을 그들의 제후로 세우고

          철부지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리라.”는 말은,

하느님은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지도자들을 의지하는 유다에게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로부터 스스로 넘어지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 가장 지혜롭고 능력 있는 자를 지도자로 세웠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풋내기처럼 어리석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풋내기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라는 말은

          문자대로 풋내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신뢰하고 세운

           지도자들을 풋내기들처럼 어리석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지도자를 어리석음에 빠지게 하셨을 때 유다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8절, “예루살렘은 비틀거리고 유다는 쓰러졌으니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유다의 황폐함에 대한 원인을 말해 주고 있다.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거슬러”라는 말은 사회를 하나의 인격으로 볼 때

           전인격적으로 하느님을 거역했다는 의미다.

그들의 문화와 사상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고

             그들의 경제, 정치, 사회 활동이 하느님을 거역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불신앙적이었다.

이처럼 한 개인이나 사회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을 때,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권고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패함이

                    도를 넘어 서 있기 때문에 권고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황폐한 곳을 다시 고치기 위하여 요청 되는 것은 하느님의 징계의 채찍뿐이다.

하느님께서 심판의 칼을 통하여 回生이 불가능한 부분을 제거하고

                   회생 가능한 곳을 치료하실 때 비로소 그들은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또 하나의 은혜인 것이다.

 

9절,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자기들의 죄를 증언하고

           그들은 소돔처럼 자기들의 죄악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이들은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죄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行惡이 상식으로 인정 되었다.

이런 유다야 말로 소돔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스스로 재앙을 자초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시대 시종여일하게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시기 때문이다(3:10-11).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3,13-15)

 

본문은 이스라엘 지도자의 부패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 “포도밭을 망쳐 놓았다. 빼앗은 것으로 가득하다.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짓뭉개느냐?” 등과 같은 표현들은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포악함과 탐욕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 주고 있다.

지도자가 탐욕에 이끌린다면 그로부터 바른 지도력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지도자가 바른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

                그 사회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지도자의 지도력은 한 사회를 의로운 사회로 만들기도 하고

            부패한 사회로 만들기도 한다.

 

예루살렘 여인들에 대한 경고(3,16-26)

 

유다와 예루살렘을 부패케 했던 또 하나의 죄의 씨는 백성들의 허영심이었다.

허영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의미나 또는 가치에 대하여

                진지함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장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도 주지 않는다.

허영심은 오직 현실의 쾌락만을 추구하게 할 뿐이다.

따라서 모든 부패는 바로 이 허영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허영심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본문에 기록된 유다가 스스로를 장식하기 위하여 사용한 물품은 23개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허영심에 사로 잡혀 있는지 보여 준다.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추한 모습을 장식으로 감추었다.

이처럼 인간의 허영심이란 결국 자신의 수치스런 모습을 감추기 위한

             모든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처럼 허영심에 이끌러 위선적인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그들의 모든 장식을 없애 버리시고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밧줄이 허리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를 대신하고

                  자루조각이 화려한 옷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장정은 칼에, 그들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심판이 임할 때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곡뿐일 것이다.

그 때 시온은 황폐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을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의 탐욕과 백성들의 허영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부패의 死線을 넘게 한다.

 

4,1 그날에 여자 일곱이 남자 하나를 붙잡고 애원하리라.

“우리 양식은 우리가 장만하고 우리 옷도 우리가 마련할 터이니

        제발 당신을 남편이라고 부르게만 해 주셔요.

        우리의 이 수치를 모면하게 해 주셔요.”

 

이 말씀은 3장에서 시온의 딸들의 부패함과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3:16-26).

여기 “그 날”이란 하느님께서 시온의 딸들을 심판하시는 날을 의미한다.

이때 유다의 남자 대부분은 전쟁에 나가 죽었기 때문에

         여인들에게는 결혼할 남자가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결혼해 달라고 사정할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家父長的인 가정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이와 같은 심판이 유다에게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家長은 한 여자의 남편이요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가정의 보호자이다.

예배 때에는 예배의 주관자이고, 가르침이 필요 할 때는 교사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정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는 책임을 지고 있는 자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가장의 존재는 가정의 평화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인에게 결혼할 남자가 없다는 것은 가정을 이루 수도 없고

                 또한 가정을 지킬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계약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황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시온의 딸들의 行惡으로 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