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예수의 영원한 사제직과 영원한 희생제사(5,11-10,30)
성숙한 신앙생활(5,11-6,12)
5,12-14 :
저자는 이처럼 심오한 진리를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무지를 지적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無智로 인하여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할까 하며 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시간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영적인 성장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어린아이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저자의 눈에 비춰진 유대인들의 모습은 이처럼 정상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아직도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자라고 책망하며
영적으로 성장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처럼 하느님의 백성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영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항상 예배 의식에 참여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 가운데 영적으로 역동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다만 종교적 관습으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도 말씀이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도록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다면
영적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적 민감성을 계발해 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우리에게 요청 되는 것은
묵상이다. 세상과 분리 된 침묵의 시간을 마련하고
하느님과 홀로 대면한 가운데 그분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역사할 때까지 묵상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영적 무감각을 각성시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6,1-12 :
저자는 5장에서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할 것을 권고했고(5,11-14),
계속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더 온전하게 성장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여기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란
하느님의 말씀의 초보와 같은 뜻이다(5:12).
문맥으로 볼 때 이것은 스스로 말씀을 깨닫거나 분별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누군가에 의존하는 신앙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 삶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에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말씀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은 마치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4:12)”처럼 그들 가운데 민감하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
저자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요청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
(말씀의 역사하심에 대한 무감각 상태)”를 버리는 것임을 알았다.
다음으로 저자는 성도들에게 “죽은 행실을 회개 할 것”을 권고하였다.
여기 “죽은 행실”이라는 말 자체는 “생명의 역사”와 반대되는 언어이다.
즉 참된 신앙을 생명으로 묘사한다면 관습적이고 관념적인 신앙은
죽은 행실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행실이란 관습적이거나 전통적으로 행해 오는
예배 의식 등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율법이 명하고 있는 예배 의식들이 하느님과 역동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고 단순히 의식으로만 행해진다면
이런 것들이야 말로 죽은 행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영적으로 온전함 가운데 나가기 위해서는
죽은 행실로부터 돌이키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도들에게 계속하여 “하느님에 대한 믿음,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성숙한 경지로 나가자.”라고 권고하고 있다(1-2절).
여기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의 고백들
즉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에 대한 신앙의 고백들을 떠나서
다른(거짓)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고백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이 고백들로부터 떠나서 다른 터를 닦는다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고백들 위에 굳게 서서
믿음의 진보를 위하여 힘쓰는 자들이다.
6,4-8 :
저자는 성도들에게 두려운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다.
그것은 한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6:4-6).
여기 “한 번 빛을 받아”의 의미는 다음에 계속 되는 말씀들,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과”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 사람들”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언급들은 하느님의 은혜로 “영적 무지(불신자의 상태)”로부터
“영적 각성”에 이르게 된 체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신령한 체험을 한 후 타락한 자는 하느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행위이므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6:6).
이런 자들은 마치 하늘로부터 동일하게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지만
어떤 땅은 채소를 내고, 어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과도 같다(6:7-8).
채소를 내는 땅은 복을 받지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버림을 당하고
그 땅으로부터 나온 所産, 즉 가시와 엉겅퀴는 결국 불사름을 당하게 될 것이다.
4-8절은 신약 성경 중에서 해석하기에 난해한 구절 중 하나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신약의 대부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언제나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고,
또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됨을 말해 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6,9-12 :
저자는 이처럼 엄중한 경고의 말을 한 후 위로의 말씀을 주고 있다.
그는 먼저 이 경고의 말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을 것임을 말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더 좋은 것,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6,9).
즉 앞의 경고가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말한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행위로 인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성도를 섬기고 있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섬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믿음은 언제나 삶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행동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성도들에게 끝까지 이처럼 믿음에 따라 살도록 권고하였고
그들이 끝까지 믿음에 따라 살 수 있는 길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
그들을 본받는 것임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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