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사무엘기 공부

하느님의 궤가 돌아오다(6,1-7,1)

윤 베드로 2017. 1. 30. 21:08

Ⅰ-10. 하느님의 궤가 돌아오다(6,1-7,1)

 

 

*하느님의 궤의 귀환에 대하여 말하는데, 두 가지 주제가 엇갈리어 나타난다.

①이스라엘 하느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면죄 제물 준비,

②불레셋인을 괴롭힌 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며,

이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기 위한 방책이다.

②의 것은 7-9절에 나온다.

 

1-9, 섭리인가 우연인가?

블레셋 사람들이 "계약의 궤"로 인하여 고민하다가 그것을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방법에 대하여

 "사제들과 점쟁이들을 불러서" 문의 하자,

그들은 하느님의 궤를 돌려보내려면, 그냥 보내서는 안 되고 보상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보상 제물로 통치자들 수만큼, 금으로 만든 종기 다섯 개와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함께 보내라고 하였다(3-4절).

③그러면서 “새 수레 하나를 마련하여,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묶고, 주님의 궤와 보상 제물을 수레에 실어 보내는데,

④그렇게 해서 보냈을 때, 수레가 제 고장에 난 길을 따라 벳 세메스로 올라가면,

그가 우리에게 큰 재앙을 내린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손이 우리를 친 것이 아니라,

재앙이 우리에게 우연히 닥쳤다는 것”이라고 한다(7-9절).

 

⇒당시 블레셋 제사장들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족속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어디서 말미암았는가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그 재앙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부터인지

아니면 다만 우연인지를 궁금해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9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은 재앙의 근원이

하느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

수레의 진행방향을 보아 재앙의 근원을 규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새끼가 딸리지 않은 암소를 사용한다면,

그 암소가 목적지를 향해 곧장 간다고 하더라도, 그 암소는

본능대로 길을 따라 간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새끼가 딸린 암소를 사용할 경우,

그 암소가 새끼를 개의치 않고 그렇게 곧장 간다면

거기에는 하느님의 절대적 섭리가 개입됐다고 단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 때문에 블레셋 제사장들은 새끼가 있어

그것들에게 젖을 물리는 암소를 법궤 운반용으로 택했던 것이다.

 

10-18, 하느님의 섭리 :

사람들은 그대로 하였다. 그들은 수레와 주님의 궤, 보상 제물로 금으로 만든 쥐와

종기 모양의 물건들을 담은 상자도 실었다.

②그러자 소들은 벳 세메스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곧장 걸어갔다(10-12).

③그때에 벳 세메스 사람들은 궤를 보고는 기뻐하며, 수레를 부수어 장작을 만들고,

그 소들을 주님께 번제물로 바쳤다(13-15).

④필리스티아인들의 다섯 통치자들은 이것을 보고 그날 에크론으로 돌아갔다.

 

⇒이 같은 사실은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스스로 기준을 세 운

바와 같이(9절), 블레셋에게 임한 재앙이 하느님의 진노로 말미암았음을 명확히 보여 준다.

①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소들이 수레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과,

②더군다나 젖 빨리는 새끼 송아지들을 둔 상태에서

좌우로 치우침 없이 곧장 나아갔다는 점분명 이 소들이 하느님의 강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6,19-7,1, 블레셋에서 돌아온 계약궤 :

①벳 세메스 사람들은 “이분을 어디로 보낼까?” 하고 의논하다가,

②그들은 키르얏 여아림 주민들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내려와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가 주시오.” 하고 청하자,

③그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가 아비나답의 집에 옮기고,

그의 아들 엘아자르를 성별하여 그 궤를 돌보게 하였다.

 

⇒블레셋에서 돌아온 계약궤를 성막이 있는 실로에 보관하지 않은 이유 :

①아벡 전투(4:9-11)결과, 실로는 블레셋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고,

②실로 성소가 주님께 더럽혀진 결과 궤를 빼앗긴 것으로 간주하고,

당시 백성들이 궤 보관 장소로 실로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③또 되도록이면 큰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궤를 보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