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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2> 루카 (중) 이방인 포함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자녀`

윤 베드로 2016. 8. 22. 17:24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2> 루카 (중)

 

 

 

이방인 포함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자녀'

 

 

▲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그림은 안 반 스코렐의 '착한 사마리아인'.

 

 

루카 복음과 마태오 복음은 여러 면에서 비교되곤 하는데,

두 복음은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는 위치와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마태오복음은

첫 부분에 아브라함에서 마리아로 내려오는

하강형으로 족보를 소개한다.

반면 루카복음은

 예수가 광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족보를 소개하는데,

그 형식도 예수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상승형을 취한다.

이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이르는데,

루카 사가는 아담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그를 '하느님 아들'이라 칭한다.

이는 이방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하느님 자녀라는 보편주의를 적용한 것이다.

족보를 예수의 세례 사건 이후 소개한 것은

모든 믿는 이들이

세례로 성령을 받음으로써

참다운 하느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례받은 예수는

사탄의 유혹도 극복해내고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나자렛회당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라며 희년을 선포했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 은총의 해는 종말론적 희년의 선포다.

예수는 청중 앞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봉독한 다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다(루카 4,21).

 이는 종말의 시기에 약속돼 있던

하느님 구원이

예수의 선포를 통해 이뤄졌음을 뜻한다.

루카 사가는 위 구절을 비롯해

복음 안에서 '오늘'이라는 단어를 즐겨 썼던 것도 같은 의미다.

예수 활동의 중심은 말씀의 선포다.

그는 희년 선포 후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거나

구마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고,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이는 하느님 나라 선포가

단지 언어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구체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아가

하느님 다스림이

우리 가운데에 드러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11,20).

예수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2-24)고 말했다.

이는

많은 예언가가

하느님의 아들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했으며,

제자들은 구원의 오늘을 경험하며

그러한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루카 사가는

예수를 만난 이들은

그 자체로써 구원을 경험했으며,

하느님 나라가

예수를 통해 우리들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루카복음에서 강조되는 예수의 모습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다.

예수는

스스로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고 말하면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즐겨했다.

이는 여러 사람에게 충격적으로 비춰졌는데,

특히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했다.

예수는

이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고,

이러한 태도는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드러난다.

죄인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나라 선포는

선민주의,

자연도태 같은 세상 법칙에 반대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예수의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는 말에 대해

한 율법학자는 "그렇다면 그 이웃이 누구인가"하고 물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두고

사제와 레위인은 거들떠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은 응급조치한 다음

여관에 데리고 가

그를 돌보아주도록 부탁하고, 추가 경비도 지불한다.

이러한 선행을 베풀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예수가

역시 이 이야기에서 높이 평가했던 점 중 하나가

익명으로 선행을 베풀었던 점일 것이다.

이 세상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기란 힘들다.

때문에

예수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이다.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아온 만큼

조건 없이 나를 내세우지 말고 100%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나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이웃이 돼 줘야 하지 않겠는가.

교부(敎父)들은

이 이야기의 사마리아인을 예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마리아'는 히브리말로 목자를 뜻한다.

예수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할 수 있도록

교회라는 여관에 우리를 맡겼으며,

다시 돌아와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하고 떠난 이다.

그리고

예수는

여러분 자신이 누군가에게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돼 주라고 말하고 있다.

 

 

<가톨릭대학 성서신학 교수 백운철 신부님>

 

 

 

 

 


 

 

 

 

 

 

 

출처 : 고 운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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