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는 기쁨, 희생없는 사랑이 있나요?
왜 하느님의 아드님이 고통을 겪으시고, 죽음을 감수하 셨을까요?
신적 존재란 죽음도, 고통도 겪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요?
성경은 우리 인간의 고통과 죽음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왜 고통과 죽음이 필연적인 것일까요?
고통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는데 아무런 가책도 아픔도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죽였는데 죽은 사람도, 나도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 닙니다.
자녀가 밤늦게 돌아오는데, 남편이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데,
아내가 병으로 힘들어하는데 나는 아무런 아픔도 걱정도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만큼 고통을 겪게 되어 있나 봅니다.
우리 사는 인간 세상은. 혹자는 고통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여행을 시키랍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니까요.
사실 훌륭한 인물이란 고통스러운 일을 잘 겪어낸 사람들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고통 속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 스스로가 잘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연필을 깎다가 실수해서 손을 베이는 아픔을 겪습니다.
운전을 잘못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내가 잘못하든, 다른 사람이 잘못 하든, 그것이 도덕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결과로 고통이 닥칩니다.
나의 잘못도, 다른 사람의 잘못도 아닌데 닥치는 고통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 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그러고 보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인가 봅니다.
대속의 의미도 있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7-28)
희생의 의미 도 있습니다.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가 말합니다.
“이 세 상이 살만하다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주 편리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먼 거리를 빨리 갈 수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 휴대폰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의 노력과 피땀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힘들고 불편하다면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죄악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희생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의 희생보다 더 큰 아버지 하느님의 희생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무엇보다 우리 인간 세상의 고통이 왜 있냐는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을,
예 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조규만 주교 | 서울대교구 총대리 (2016.3/20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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