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강의/복음 묵상

절망 속에서 희망이 된 라자로의 소생

윤 베드로 2015. 4. 30. 14:58

●절망 속에서 희망이 된 라자로의 소생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 44).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항상 체험하는 절망과 비탄 속에서

           어떻게 희망과 자유를 가질 것인가?

삶과 죽음-생명의 탄생, 노인의 죽음 등-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교차되는 삶의 현상이다.

우리는 흔히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 25)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죽었어도 살아 있는 사람, 살았어도 죽어 있는 사람을 구별하도록 하신다.

이것은 성서의 맹인 이야기(요한 9, 1-41)에서 보듯이

           맹인이면서 볼 수 있는 사람과

           눈을 뜨고서도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하심으로써

      깊은 절망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만 있다면

      희망으로 솟구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즉 새로운 희망, 부활은 세상이 끝날 때에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이런 뜻에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예수님 생전에 일어났던 사실임에도

       요한 복음 저자는 오늘날에도 이 일이 일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라자로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무력함"이란 뜻이다.

                 즉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라자로가 죽어 가고 있기에 누이들은 예수께 전갈을 보냈으나

              예수님은 소식을 받은 후에도 이틀 동안이나 지체하시며

              라자로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일과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라자로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다.

누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일찍 오시지 않은 것을 원망하면서도 예수께 간청한다.

예수께서 라자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누이는 세말에 일어날 부활로만 알아듣는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서 라자로를 살리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요한 11, 44).

 

라자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 삶 속에서 매일매일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부활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단 한 번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에제키엘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시체들에게 말하였다.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에제 37, 12-13).

 

2. 절망 가운데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할 우리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상, 사회는 라자로처럼 무력하고 병들어 있고

        아마도 죽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온갖 불의와 부정과 인권 유린, 생명 경시,

       상호 불신과 질투와 경쟁으로 생명을 잃어 가고 있다.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서서히 죽어 가고 있고

               온갖 질병과 인간이 만들어 낸 공해 등으로 무덤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느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절망한다. 왜 하느님은 가만히 계시느냐고….

아마도 하느님이 가만히 계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덤에 떨어진 우리를

           무덤 속에서 끌어내시며 "나오너라."(요한 11, 43) 하시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몸에 감겨 있던 모든 결박을 다른 이들로 하여금

          풀어 주라고 하실 것이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요한 11, 44).

아니면 오늘날 결박당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우리에게 그들을 풀어 주어 자유롭게 가도록 하라고 하시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묶인 이들은 누구이겠는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일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풀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묶인 이를 풀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뜻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바로 우리 인간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