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적인 하느님의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5, 12-14).
1.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베푸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Eros)도 있고,
또 지식을 사랑하는 철학적인 사랑(Platonic love)도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보편적이며 헌신적이고
봉사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Agape)이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도 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우리 인간도 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에 대해서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사도 10, 34-35).
2.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또 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그 모두가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다.
하느님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저버리거나 멸시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다 받아 주신다.
다만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구약 성서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해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엄격한 재판관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대죄를 지었는지를 따지시고,
대죄를 지었을 때는 가차없이 처벌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인생의 고통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로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죽은 후의 내세에만 집착하고, 이 현세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길이라고만 생각하여
현세의 중요성과 현실을 포기하는 경향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도덕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기도 한다.
즉 하느님이 계시니까 사람은 착하게 살고 악을 피할 수 있다는 인생관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은 부분적으로는 옳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말해 주지는 못한다.
3.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 9)라고 말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만이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1요한 4, 7참조).
그런데 성서를 통해 볼 때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며
모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헌신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으로 드러난다.
즉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우리 인간들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고 그 사랑에 바탕을 둔 새 계명을 주셨다.
즉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 17)라고 말씀하신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이웃들간의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랑도 또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요한 15, 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 12).
4.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웃을 위한 희생적 봉사적 사랑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겠다.
물론 그분의 넘치는 사랑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마는
다만 몇 가지로 살펴보면 헌신적이며 봉사적이고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은 스승이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는 "너희는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봉사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또 한편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다.
즉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 밖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많이 있지만,
이러한 봉사적, 희생적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다.
이러한 헌신적이고 봉사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또 인간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가능해진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 근거해야만 남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자양분을 받아야 한다.
5. 우리는 사랑 나무이신 그리스도로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사랑의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마치 포도나무로부터 포도 열매가 탐스럽게 열리듯이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랑 나무이신 예수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 9) 하고 권고하신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 15, 16) 하고 사명을 주신다.
그 썩지 않을 열매는 사랑의 열매를 말한다.
사랑만이 썩지 않고 영원히 남을 수 있다.
온갖 탐욕과 이기심의 열매는 부패하고 썩기 마련이다.
6.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불우 이웃을 위한 사랑의 대바자회
요즈음처럼 사회가 어수선할 때일수록 썩지 않을 사랑의 열매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을 위한 사랑이 요구된다.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 없이 어린 몸으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소년 소녀 가장들,
여러 형태의 장애인 가정들, 아버지나 어머니의 불화나 사고
혹은 이혼으로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못 받고 자라난 결손 가정의 아이들,
고아들, 은퇴 노인들 그리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불우한 이웃들이 많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여 무슨 일이든지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당에서 실시하는 불우 이웃을 위한 사랑의 대바자회도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본당의 각 단체에서는 각자 맡은 일들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서로들 귀중한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또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던 물건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놓으면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의 잔치에 귀중한 시간을 내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일도
사랑의 한 표현이 될 것이다.
사람은 돈과 재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얼마나 유용하게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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