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설렘과 동시에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개 두 가지 삶의 자세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제대로 살아야 예수님께서 얼른 오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누구보다 잘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안 오시니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해지고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제 삶에 대한 각성 없이 흘러가듯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이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열심한 만큼 자신들의 엄격한 잣대로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그 비난은 공동체의 친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남의 눈의 티(본디 그리스 말은 ‘잔가지’를 가리킵니다.)를 빼내겠다는 호기가,
자잘한 잘못을 확대 해석하여 형제와 이웃을 마치 악마를 보듯 함부로 대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잘못에 대한 훈계나 비난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예의 없음’이나, 보수의 이름으로 인습이나 관행을 무작정 옹호하는
‘어리석음’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형제고, 형제여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집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자꾸만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정 없이 제 목소리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이의 ‘정의로움’은 참 애처롭고 서글픈 것이지요.
그냥 말없이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손,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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