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전도서 공부

전도서 9장 공부 : 모두 같은 운명

윤 베드로 2017. 11. 18. 09:05

모두 같은 운명(9,1-6) 


9,1 :

모든 사람에게 미래는 불확실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래는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처럼 미래가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미래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미래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것 자체가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9,2-6 :

“모두 같은 운명이다(2절)”는 말은 죽음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죽음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이와 같은 일이야 말로 “태양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악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동일하게 임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덧붙여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의 아들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고

살아 있는 동안 그들 마음속에는 우둔함이 자리한다.

그런 다음 죽은 이들에게로 간다.(3절)”

이 말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언젠가 죽음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준비함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무시하고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런 삶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도자는 죽음을 말한 후에 이제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하고 있다.

여기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9:4)”라는 말은

살아 있는 것들의 특권을 말해 주고 있다.

사자는 모든 짐승의 왕과 같이 우월하지만 살아있을 때만 그러하다.

만일 죽은 사자라면 그것은 개보다도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자는 “산 이들에 속한 모든 이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즉 사람에게도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젠가 반드시 임할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을 기회로 삼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간으로서 본분을 다하도록 하려 함이다.


인생을 즐겨라(9,7-10) 

 

전도자는 살아있는 동안을 기회로 삼고 살라는 권고에 대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기회로 삼고 사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 “기쁨” “기분 좋게” “네 옷을 항상 깨끗하게” “향유” 등과 같은

표현들은 삶의 긍정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기회를 기쁘게 살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삶의 기회를

“너의 허무한 모든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의식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날 동안 은혜 안에서

기쁘게 살되 언제나 죽음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이런 권고는 11:9-12:1에서 또 다시 반복하고 있다.


시간과 운명(9,11-12) 

 

전도자는 세상의 모든 일이 각각 가져오는 결과들을 살피며

이런 결과들은 사람이 예측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이런 결과들이 사람의 예측대로 이뤄지기보다는

오히려 시간 가운데 마치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시간과 우연이라는 말은 사람이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으로서

하느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는 영역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이 시간과 우연에 의해

그 결과가 각각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몹쓸 그물에 붙잡히는 물고기들처럼 올가미에 붙잡히는 새들처럼 

  그렇게 인간의 아들들도 나쁜 때가 갑자기 그들을 덮치면 사로잡히고 만다.”

즉 우리의 장래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우리는 수고와 관계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 되어있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지혜(9,13-10,3) 

 

9,13-18 :

전도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전쟁에서 자기 성읍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그는 전쟁에서 자기 성읍을 구한 자로서 마땅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가난한 자라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잊어진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인정받으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지혜자의 말은 우매자의 호령보다 낫고 병기보다 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파괴적인 일을 막지는 못한다. 

 

10,1-3 :

성경에서 향유는 언제나 귀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향유는 성소의 성물들을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고,

또한 일반 사람들에게 사치품의 일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귀중한 향유일지라도 파리 한 마리가 빠져서 썩는다면

향내를 내야할 향유는 오히려 악취가 나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

향유처럼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우매함은

우리를 어리석고 무가치한 존재로 만든다.

“지혜로운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어리석은 마음은 왼쪽에 있다.”는 말은

우리를 존귀한 존재가 되게도 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게도 하는

 지혜와 우매함이 모두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지혜를 내어주는 마음과 우매함을 내어주는 마음의 위치는

각각 다르다. 지혜를 가져다주는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함을 가져다주는 마음은 왼쪽에 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경향,

즉 하느님 지향성과 자아 중심 지향성을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할 때 지혜로운 자가 되지만

자아중심으로 향하면 생각하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뜻에

반하게 됨(창조의 목적에 역행)으로 어리석고 우매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