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전도서 공부

전도서 7장 공부 : 행복의 상대성

윤 베드로 2017. 11. 17. 07:03


행복의 상대성(7,1-14) 


7,1-4 :

현재 시점에서 생각할 때 보배로운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보다 나을 것이고, 

      출생하는 날이 죽는 날보다 나을 것이고,

초상집보다는 잔치집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이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한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현재의 즐거움 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라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택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참조7:8).


7,5-7 :

이것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혜자는 현재의 즐거움보다

더 중요한 것을 택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은 지금의 즐거움을 주지만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은 스스로를 온전히 세우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우매자의 노래보다는 지혜자의 책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억압은 지혜로운 이를 우둔하게 만들고 뇌물은 마음을 파멸시킨다.(7:7)”

억압과 뇌물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지혜자가 이런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사리판단이 어두워짐으로 우매하게 되는 것이다.


7,8-10 :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보다 더 나은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일의 시작을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보다는

끝은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더 낫고

교만한 마음보다는 참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므로 지혜는 현재 선택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들은 옛날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날이고

오늘만이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난 날들을 생각하며 오늘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오늘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총의 날로 믿고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함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환경을

허락해 주시든지 바로 그곳에서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며 산다.


7,11-14 :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지혜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지만

지혜가 더욱 소중한 것은 지혜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 “태양 아래 사는 이들에게”란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유업처럼 아름다운

것이 되고 또한 유익을 주기 때문에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지혜 중의 지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13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라.

그분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똑바로 할 수 있으랴?”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지혜로운 자는 하느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하려고 하지 않고

곧게 하신 것을 굽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진정한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을 아는 것 또는 경외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자는 지혜의 소중함을 말한 후 그리고 참된 지혜는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한 후,

이것을 삶 가운데 적용시키고 있다.

여기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 불행한 날에는, 이 또한 행복한

날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하여라.”는 말은

각각의 날들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중용(7,15-22) 

 

7,15-18 :

본문을 문자대로 읽는다면 중용의 길이야 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의롭게 살고 악에서 떠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원칙에는 지나침이 없음도 말씀하셨다.

즉 온전히 의롭게 살지라도 그것이 지나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째서 본문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맥을 볼 때 “너무 의롭게 되지 말라(16절)”는 것은

완고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즉 자신만이 의로운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완고함을

     여기서 “너무 의롭게 되지 말라”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처럼 완고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스스로 패망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본문에서 “의롭지만 죽어 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라는 말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나치게 완고한 자와 대립적 위치에 있는 자를 말할 뿐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전도자는 이 물음에 대하여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를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하나에서도 네 손을 떼지 않는 것이

좋다. 정녕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그 둘 다에서 성공을 거둔다.”

여기 “하나를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하나에서도 네 손을 떼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치우치지 말라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지혜는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즉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단순한

의식의 표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사랑에 의존한다. 

 

7,19-22 :

지혜가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지혜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열 명의 관리자들보다

더 능력 있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고 善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7:20)”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믿고

그를 의지하게 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로 부족한 것들을 인정해 주며 더불어 살고자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지혜로운 삶이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온갖 이야기에 네 마음을 두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되리라.

너도 다른 이들을 여러번 저주했음을 너 자신이 알고 있다.(7:21-22)”

여기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마라”는 것은

사람의 말에 지나치게 민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이 곧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말에 민감하다면

그는 시험에 들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하기 보다는

비난의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도 그렇다.

그래서 전도자는 우리에게 “너도 다른 이들을 여러 번 저주했음을

너 자신이 알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는 지혜(7,23-29) 

 

전도자는 여기서 지금까지 인생을 궁구(窮究)한 것에 대한

부분적인 결론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지혜를 얻기 위하여 수고했지만 그것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7:23),”

“심오하고 심오하니 누가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오?(7:24)” 등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깨닫고자 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라는 것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7,26)”라는 것이다.

여기 전도자가 말하고 있는 “여인”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지혜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악한 길로 인도하는

“미혹하는 것들”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여인을 수식하고 있는 “올가미와 그물” 그리고 “굴레(포승)”들은 

            사람을 유혹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여인의 유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자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라는 말은 하느님을 기뻐하는 자 외에는

여인의 유혹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더한 말이다.

전도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이 깨달은 일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7: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