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전도서 공부

전도서 3장 공부 :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윤 베드로 2017. 11. 15. 06:59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3,1-15)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존재하다가 시간과 함께 소멸한다.

겨울에 얼어붙은 생명들은 때가 되면 되살아나서

그 힘을 더하다가 결실을 가져온다.

이런 일은 시간이 자연 안에서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러나 시간은 자연 안에서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같은 일을 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태어나서 시간과 함께 성장하다가

또한 시간과 함께 늙어 흙으로 돌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곧 삶이고 시간에 대한 이해가

곧 삶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1절,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일이 시간에 예속 되어 있다는 것과

모든 일은 이룰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존재 양식을 각각 달리한다.

즉 낳을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합당한 존재 양식을 드러낼 때

그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3:11)”라고 말한 것이다.

실제로 사계절이 있는 곳에서 봄에는 초록빛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짙푸름이 아름다우며,

또한 가을에는 산하를 물들인 형형색색이 아름답다.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언제까지나 짙푸를 것으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자다.

시간의 신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때에 합당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때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3:9,10)”

여기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라는 말은 시간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수고는 헛될 뿐이라는 의미다.

이들의 수고는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 되지 못하고,

수고를 위한 수고가 될 뿐이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3:12,13)”

시간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시간이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시간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고

또한 우리 가운데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시간을 통하여 만물을 통치해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방식으로 만물을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치하심이 사람들에게 언제나 신비함이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변하는 시간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한다.

즉 시간에 의하여 순간순간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영원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는 것이다(3:14).

여기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영원한 것”이야말로 시간을 통하여

만물을 통치하시는 방식이다.

“있는 것은 이미 있었고 있을 것도 이미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라진 것을 찾아내신다.(3:15)”

시간을 통하여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통치 방식은

예전에도 지금도 장래에도 변함없이 계속 될 것이다.


정의와 응보(3,16-22) 

 

전도자는 凡事에 기한이 있음을 말함으로

하느님께서 시간을 통하여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말한 후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통치가 있는 세상에도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모순이 있음을 말한다.

전도자가 시간 외의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통치아래 있는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었다.

얼마나 모순 된 일인가?

하느님의 통치아래 있는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재판하는 곳에도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전도서는 의문을 품고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

전도자는 자신이 찾은 대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말하였다. 의인도 악인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니

모든 일과 모든 행동에 때가 있기 때문이다.(3:17)”

즉 전도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에 대한 질문들을

하느님의 때까지 미루어 놓았다.

그가 말한 하느님의 때란 바로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를 말한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은

시간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지금 모순처럼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하느님의 때가 되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우리에게 언제나 신비가 되는 것이다.



전도자가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있는 모순에 대하여 생각할 때

또 하나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짐승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자연 상태에서는 힘이 강한 자신을 위하여

자기보다 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나

또는 사람이나 짐승 모두가 시간에 예속되어 때가 이르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른 것이 없다.

모두 흙으로 말미암고 흙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외적으로 볼 때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짐승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로서

죽음 후에 각각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

전도자는 짐승과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리오?(3,21)”

전도자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지

12,13절을 통해 말했던 것처럼

여기서 또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모순이 있는 세상일지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날 동안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자신이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믿고

사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알고 사는 것이 복된 삶이고

지혜로운 삶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