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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울 천주교순교성지

윤 베드로 2016. 4. 13. 09:22

서울의 가톨릭 순교성지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가신 곳

2014년 8월 14일, 대한민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더불어 그가 찾은 곳들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의 천주교 순교성지들이다. 교황은 방한 사흘째인 8월 16일,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인 서울 서소문 순교성지를 찾아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올렸다. 서울에는 서소문 말고도 3곳의 순교성지가 더 있다. 교황의 방문으로 관심을 모은 서울의 순교성지들을 둘러보았다.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 서소문 순교성지

교황이 서울의 순교성지들 중 서소문 순교성지를 방문한 것은 이곳이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서소문 밖은 조선시대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에 연루된 죄인들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다. 그 중 모반죄는 형장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대부분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유교 경전인 오경 중 《예기》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 이곳은 바로 사직단(현재의 사직공원) 우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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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공원 전경

중림동 약현성당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서소문 밖 처형장은 가장 중요한 순교터가 되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서학(西學)을 믿는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게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했다. 순교는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을 비롯해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등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100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서소문공원이 된 처형장 자리에 현양탑을 세웠고, 인근에 있는 중림동 약현성당에 서소문순교성지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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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순교성지전시관 내부

서소문순교성지전시관 전시물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곳, 새남터 순교성지

한강변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곳으로 유명하다. ‘새남터’는 이곳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라 억새와 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이 무예를 단련하는 연무장과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주로 평신도들을 처형했다면, 이곳에선 성직자나 지도층 신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의 첫 순교자가 되었고, 기해박해 때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순교했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했으며,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되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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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기념성당

김대건 신부 동상

현재 새남터 순교성지에는 새남터 기념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1987년에 완공된 성당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위에 3층 탑을 쌓은 특이한 모양이다. 성당 안 새남터 기념관에서는 이곳에서 순교한 14인의 동판화와 함께 이들의 유해를 모신 성인 유해실, 박해 당시 고문과 처형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당시 사용했던 형구 등을 볼 수 있다. 성당 주변에는 예수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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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4인의 동판화

처형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

순교자들의 머리를 자른 산, 절두산 순교성지

한강변 양화진의 절두산 순교성지는 이름 그대로 ‘머리를 자른 산’이란 뜻이다. 절두산이 처음부터 이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가을두’라고 불렸는데, 우리말 ‘들머리’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 불쑥 솟은 모양이 누에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머리를 잘렸다고 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절두산이라 불렀다.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가 이 지역 땅을 구입하면서 절두산이란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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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성지 기념비

외국인 신부가 상주로 위장한 모습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가 서소문 밖이나 새남터에서 이곳 절두산으로 바뀐 것은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왔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의 침략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 사람들이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원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그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일벌백계의 본보기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17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절두산 성지에는 지난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절두산 순례성당과 순교기념관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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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절두산 순례성당

기해박해 순교 장소, 당고개 순교성지

1839년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주로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이뤄졌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서울 용산의 당고개에서 행해지게 된다. 이는 다가오는 설날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처형장을 옮겨달라는 상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 인해 1839년 음력 12월 27일과 28일 이틀간 이곳에서 모두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27일에는 최양업 신부의 모친인 이성례를 비롯해 박종원, 홍병주, 권진이, 이경이, 손소벽, 이인덕 등 7명이, 다음날에는 홍영주, 최영이, 이문우 등 3명이 순교했다. 이중 홍병주와 홍영주는 형제로서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의 손자였다. 형제나 부자를 함께 처형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선의 법률에 따라 두 사람은 하루 시차를 두고 처형되었다.

당고개 순교성당

당고개 성지의 순교자들 중 9명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던 1984년에 시성되었고, 이성례는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기간 중에 시복되었다. 천주교에서 시성이란 죽은 이를 성인으로 올리는 것이고, 시복이란 복자로 올리는 것이다. 교황청에서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선포한 이를 성인이라 하고,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된 사람을 복자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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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당고개 성모상

당고개 순교성지는 지역 재개발로 인해 2008년에 철거되었다가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2011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현재 건물 안에 성당과 전시관이 있고, 옥상에는 야외 제대와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되어 있다.

여행정보

서소문 순교성지
주소 : 서울 중구 칠패로 5
문의 : 02-392-5018, www.yakhyeon.or.kr

새남터 순교성지
주소 : 서울 용산구 이촌로 80-8
문의 : 02-716-1791, korean.visitkorea.or.kr

절두산 순교성지
주소 : 서울 마포구 토정로 6
문의 : 02-3142-4434, korean.visitkorea.or.kr

당고개 순교성지
주소 : 서울 용산구 청파로 139-26
문의 : 02-711-0933, korean.visitkorea.or.kr
출처 : 행복한건강맨
글쓴이 : 행복한 건강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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