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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묵주기도의 역사

윤 베드로 2015. 1. 14. 08:01

재미있는 묵주기도 이야기
묵주기도 유래와 변천사

 

 

▲ 성 비오 5세 교황은 묵주기도에 힘입어 레판토 해전에서 그리스도교 군대가 이슬람 군대를 물리친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제정했다. 그림은 ‘교황 성 비오 5세와 레판토 해전’.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만큼 친숙한 기도도 없다.

선물로 가장 많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묵주다.

10월은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묵주기도 성월이다.

그렇다면 묵주기도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대 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머리에 장미관을 쓰고 형장으로 나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면서 꽃송이마다 기도를 바쳤다. 묵주의 다른 이름인 로사리오는

바로 이 ‘장미 꽃다발’을 뜻하는 라틴어. 초창기 은수자들이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둥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면서

기도 횟수를 센 것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묵주기도가 틀을 갖춘 것은 13세기 도미니코 성인에 의해서다.

성모송을 150번 바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도미니코 묵주기도’이다.

성 도미니코는 이단 세력이 교회를 위협하자 이탈리아와 프랑스

각지를 돌면서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호소했다.

이에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고,

그 결과 이단 세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는 15세기에 생겨났다.

알랑 드 라 로슈 수사(성 도미니코 수도회)는 1464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생과 수난, 부활에 따라 환희ㆍ고통ㆍ영광 등 세 가지 신비로 나눴다.

이 기도가 널리 퍼지자 1569년 교황 비오 5세가 15단 양식으로 묵주기도를 제정했다.

묵주기도가 급속히 확산한 것은 19세기 들어 곳곳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부터다.

성모 마리아는 1830년 파리, 1858년 루르드,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할 때마다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환희ㆍ고통ㆍ영광의 신비 15단을 바치던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를 더한 이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를

반포하면서 ‘세상의 빛’(요한 9,5)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추가했다.

이로써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온전하게 묵상할 수 있게 됐다.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선포한 이는 1883년 레오 13세 교황이다.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한 것은 승리의 성모 축일(10월 7일)이

10월에 있기 때문이다. 이날이 축일로 정해진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1571년 그리스도교 군대가 이슬람 군대에 맞서 싸운 큰 전투가

코린토 인근 레판토 만(灣)에서 벌어졌다. 당시 성 비오 5세 교황이

그리스도교 연합군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함대가

로마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때 연합군으로 참가한 군인 가운데

한 명이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스페인)다.

양측 해군이 전투를 치르는 동안 바람이 터키군에게 유리하게 불자

교황은 교황청에 있는 고위 성직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무릎을 꿇고

승리를 빌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묵주기도 덕분이었을까.

그리스도교 군대가 대승을 거뒀다. 그러자 교황은 묵주기도를 바친 이 날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제정했다. 오늘날에는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축일로 지낸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고요의 기도

▲ 정원에 물을 주는 두 번째 방식인 고요의 기도.



신비적 기도의 두 번째 단계인 고요의 기도

성녀 데레사는 신비적 기도의 두 번째 단계로 ‘고요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이는 수동적 거둠 기도가 무르익어 가면서 영혼 안에 ‘고요함’과 ‘평화’가 지배적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 기도 역시 4궁방에서 이루어지며 4궁방을 대표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녀는 「완덕의 길」 31-32장, 「자서전」 14-15장, 「영혼의 성」 4궁방 9-14절에서 이 기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쓰인 「자서전」에서 성녀는 고요의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 고요의 기도는 좀 더 맛깔스럽고 푸짐히 즐기기 위해 온갖 능력을 자기 안으로 집중시키는 것입니다”(자서전 14,1). 무엇보다 이 상태를 주도하는 분은 하느님으로서 하느님 친히 영혼의 능력들(지성, 기억, 의지)을 모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둠은 전 단계인 수동적 거둠 기도에서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강하게 이루어집니다. 성녀가 말하는 본래적 의미의 신비적 기도는 바로 이 고요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요의 기도에서 특징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영혼이 청하는 기도를 들어주시고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 현존의 효과를 깊이 느끼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단계에서 주님은 천상적인 기쁨을 허락하시는데 이는 이 지상의 그 어떤 쾌락과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영혼은 이 기쁨을 자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맛보기 시작합니다.



정원에 물을 주는 두 번째 방식에 비유됨


성녀는 「자서전」 11-21장에서 기도를 정원에 물을 주는 4가지 방식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이 4가지 방식은 기도 단계를 빗댄 것으로 그 중 두 번째 방식은 두레박을 단 도르래를 손잡이로 돌리면서 물을 긷는 것을 말합니다. 이 방식은 기도 단계로 보면 거둠 기도와 고요의 기도에 해당됩니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고요의 기도는 이전 단계인 추리 묵상이나 거둠 기도에서보다 인간의 노력은 적게 드는 반면, 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더 기도하는 이 안에 작용함으로써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고요의 기도에 들어간 영혼 안에 당신에 대한 참된 사랑의 불꽃을 일으켜 주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직접 작용하심으로써 일어나는 효과입니다. 비록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사랑의 불꽃이 이 단계에서는 작지만, 신비적 기도 단계가 점점 진행될수록 영혼을 사르는 커다란 불로 변하게 됩니다. 이 불꽃은 하느님께서 큰일을 위해 영혼을 선택하셨다는 표징이자 보증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주님의 기도’를 구절구절 해설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는 구절이 이 고요의 기도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고요의 기도에 초점을 맞춰 그 구절을 설명했습니다. “고요의 기도 속에 있는 영혼은 주님을 깨닫습니다. 즉, 자기가 주님의 나라 안에 있으며, 적어도 그 나라를 주실 임금님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완덕의 길」 31,2). 계속해서 성녀는 이 고요의 기도에서 ‘하느님 현존’에 대한 자각이 깊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영혼은 주님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눈치만으로도 주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완덕의 길」 31,3). 그래서 성녀는, 이 상태에 들어간 영혼은 하느님 현존의 감미로움에서 유래하는 기쁨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타볼산에서 거룩하게 변모되고 광채를 뿜어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곳에 초막을 지어 머물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고요의 기도에 임하는 자세

고요의 기도에서 영혼의 주요 능력들은 수동적 거둠 기도 때보다 훨씬 더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성과 기억은 완전히 멈춰버리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활동만을 합니다. 반면, 의지는 더욱더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심지어 성녀는 이 상태에 있는 의지를 사랑하는 분의 ‘포로’가 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자서전」 14,2).

여기서 성녀는 이 기도 단계에 있는 사람이 지성의 활동을 최소화하고 의지를 쉼과 신중함 가운데 있도록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겸손 중에 단순히 그때그때 떠오르는 사랑의 말씀을 주님께 드리도록 했습니다. 고요의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히게 합니다(「완덕의 길」 31,4). 또한 이 상태에 들어간 영혼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은총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범하거나 배반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게 됩니다.

이 기도 단계의 특징으로는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깊은 평화입니다. 이 기도에서 하느님은 영혼에게 달콤함, 만족, 평화, 고요 등을 선사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은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그와 사귀기 시작하고 영혼 또한 이런 사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 들어간 영혼은 현세 사물들에 대해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녀는 이 상태에 있는 영혼이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신비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자서전」 15,8).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주시는 더욱 큰 선익에 걸맞은 깊은 겸손을 허락하시며 악마와 세속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어떤 위로도 받지 않은 채 아낌없이 십자가를 지는 은총도 허락하십니다.

▲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출처 : 행복, 나들이! 여행 !.~
글쓴이 : 빛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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