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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묵주기도

윤 베드로 2015. 1. 16. 21:57

                         묵주기도

묵주기도의 중심은 성모님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2002년 10월 16일 이미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묵주기도 15단 신비에 빛의 신비 5단을 새로 추가하여 제정했습니다. 빛의 신비 5단은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 있었던 제일 은혜로운 다섯 가지 신비, 즉 그분의 세례와 가나의 혼인 찬치 때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기적과 하느님의 나라의 선포와 거룩한 변모와 성체성사의 제정을 묵상하는 신비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의 잉태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전 생애에 걸친 구원의 신비를 전부 고루고루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묵주기도의 20단 신비는 신앙의 신비를 전부 망라하고 복음 전체를 요약하며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총합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의 20단 신비 안에 신앙의 전부가 압축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구원의 신비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것이 묵주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누구보다 가까운 분으로서 그분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셨고, 그분의 구원의 역사에 깊이 협력하셨습니다. 그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속량의 신비를 하나하나 묵상하는 것이 묵주기도입니다.

묵주기도가 묵상기도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점입니다. 묵주기도의 묵상은 각단 신비의 장면 안에 자신이 들어가 그 신비의 내용을 생각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신비 안에서 예수님과 친밀한 대화와 다정한 친교를 나누며 자신이 그 신비의 내용을 실제로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묵주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 있고, 비로소 묵주기도의 참맛을 맞들일 수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읊고 외우기만 해서 묵주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묵주기도에 지향을 세워 외우는 것은 좋지만, 그 지향을 생각하면서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지향은 묵주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세워, 묵주기도를 외우는 동안 각단 신비의 내용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 전에 ‘환희의 신비 제1단 마리아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2단 ‘ ⋯를 묵상합시다.’ ‘묵상합시다.’ 하고 외우듯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묵주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묵주기도의 매력은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며 묵상하는 데에 있습니다. 보통 묵상기도는 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침묵 속에 어떤 낱말을 되새기거나 어떤 장면이나 하느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묵상하지만, 묵주기도의 특징은 기도문을 외우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되풀이 외우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을 집중시켜 신비의 묵상에 몰두하는 것을 돕고, 각단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알맹이가 없는 헛소리가 되지 않고, 기도다운 기도, 즉 주님과의 대화와 만남이 되는 것을 돕습니다. 결국 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진정한 기도인 주님과의 대화와 만남을 누리는 것을 돕는 ‘수단’과 ‘방법’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칠 때의 문제는 각단 신비를 묵상하지 않고,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형식적으로 되풀이 외우기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어디까지나 묵상기도로서, 각단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는 것보다 각단 신비의 내용을 묵상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형식적으로 외우기만 하여 묵주기도의 참맛을 맛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각단 신비를 묵상하지 않고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형식적으로 외우기만 하면서 자신이 묵주기도를 맛들이고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딘지 잘못된 사고이거나 거짓말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묵주기도의 참맛을 맛들이고 좋아하려면 꼭 각단 신비의 내용을 묵상해야 합니다.

묵주기도의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점은 생활 속에 일하면서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 점입니다. 바쁘게 생활하고 일에 몰두한 나머지 하느님을 잊기 쉽고, 기도를 멀리하기 쉬운 가운데,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읊고 외우는 습관을 기르면 하루에 여러 차례에, 자주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이 저절로 입에 떠올라 읊게 되고, 자연스레 외우게 될 때마다 하느님께 돌아가고, 성모님을 상기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어떤 짤막한 기도문 (화살기도)이나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십자가!’, ‘하늘!’ 등의 낱말도 자주 입에 올려 읊고 외우는 습관도 생활하고 일하면서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아름다운 방법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이나 어떤 짤막한 화살기도를 수시로 입에 떠오르게 하는 습관은 참으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습관이며, 그럴 때마다 주님께 돌아가고 성모님을 상기하게 되면 더더욱 아름다운 습관이 됩니다.

그 반대로 생활하고 일하는 가운데 묵주기도의 어떤 신비의 내용이 생각으로 떠오를 때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며 계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예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지 않고, 그저 신비의 내용을 말없이 침묵 속에 ‘의식’하기만 하며 계속적으로 기도하며, ‘끊임없는 기도’의 체험이나 ‘하느님 현존의 체험’을 가지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현존의 체험’으로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의식’하는 것은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깊은 수준에서 ‘깨어 있으면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자각하는 상태,’ 다른 어떤 인간적 ‘생각’과 활동을 하면서도 그 ‘생각’과 활동의 밑바닥에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느끼고 실감하는 상태,’ 마음의 밑바닥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어떤 ‘깨어 있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하고 일하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의식’하고 ‘느끼’고 ‘실감’하며 생활하고 일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애틋한 동경과 그리움과 사모의 감정이 강해지고 깊어질수록 그 ‘의식’은 ‘생각’ 밑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 흘러 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동경과 그리움과 사모의 감정이 약해질수록 그 ‘의식’은 약해지고 자꾸 끊어지며 얼마 후 완전히 사라집니다.

묵주기도로 각단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얼마든지 깊어지고 심화되며 관상기도가 되며,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는 것도 ‘내심의 기도’가 되면서 그 기도도 어느 새 사라집니다. 사실 많은 성인들이 묵주기도의 묵상으로 심오한 관상기도의 체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묵주기도를 생활 속에 끊임없이 외우는 것도 각단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관상기도가 되며 끊임없는 기도의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묵주기도는 심오한 관상기도의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하고, 생활 속의 끊임없는 기도의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는 결코 단순한 성모 신심 기도가 아닙니다. 묵주기도는 신앙과 복음의 핵심 신비를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하는 기도이자 예수님의 구원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를 어떻게 바치고 묵상하는가는 그 사람의 영성의 심도를 나타내는 측정의 기준이 되며, 그의 신앙의 척도를 보여주는 거울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묵주기도를 쉽게 꺼내어, 가벼운 마음으로 바치는 습관을 기르고, 묵주 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의 일부분인양 지니며 살도록 합니다. 한편,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친밀하면서도 경건하게, 다정하면서도 엄숙하게, 각단 신비의 내용을 설레는 마음으로 묵상하며 바치고 묵주기도를 묵상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진정으로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 김보록신부의 영성 이야기방에서

출처 : 옹달샘-나그네들 지나다 들려 목 축일 샘
글쓴이 : 옹달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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