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자료/성경 일반 자료

1세기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 : 예수는 누구인가?

윤 베드로 2014. 10. 11. 10:07

☆1세기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 : 예수는 누구인가?

 

1. 선포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 예수는 누구일까?

每週모여 예배를 드리는 그들에게는 마치 생명과도 같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 역시 한 가지 대답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 각자의 생각에 따라, 각자의 삶에 따라,

                 각자의 생긴 귀와 입 모양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고백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최초로 예수의 정체를 설정한 것은

               바울로의 편지들에서 발견된다.

예수가 부활 승천한 이후 십자가 사건을 전파해 나간

          유랑선교사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간결하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의 정체에 대해 짤막한 ‘선포문’을 만들어냈다.

선포문의 내용은 : 표현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대체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再臨이라는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1데살 1,10).

 

     *한마디로, 유랑선교사들에게는 선포문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정체를 파악하는 척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해 처음 듣게 된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했고

                 장차 재림할 분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해 받은 선포문의 세 가지 내용을

              신념을 가지고 입에 담을 수 있어야 했으며(신조),

                 이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게끔 되었다는 사실도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수 있다.

 

2. 아들, 아브라함, 아담, 하느님

 

①1세기 교회의 유랑선교사들은 : 예수가 곧 재림하리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가 사건으로 죽음과 부활이 이미 일어났으니,

           다음에 벌어질 순서는 당연히 재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림은 점점 지연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위기감이 생기게 되었다.

예수를 직접 모셨던 사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그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늦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그분의 생생한 모습을

           글로 남겨두어야 한다!”

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작업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글줄이나 쓰는 작가라 할지라도,

          글에 담을 내용이 하늘같은 분인 예수에 관한 것 아닌가.

          심사숙고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작업은 역시 첫 운(韻)을 떼는 일이었다.

 

②예수 사건의 시작을 과연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마르 1,1).

복음사가 마르코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 운을 뗐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뭍으로 나올 때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내려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2,9-11)하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온다.

 

마르코와 그가 속한 공동체는 : 예수 사건의 시작을

             그분이 공생활을 시작하던 때로 잡았다.

             유랑선교사들이 십자가 사건에만 시선을 집중시켰던 데 비하면

                       그 범위가 훨씬 늘어난 셈이었다.

 

․마태오는 :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예수의 족보를 서두에 배치시켰다.

                   그가 집필자료로 사용한 마르코 복음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마태 1,1)

 

⇒따라서 마태오는 예수 사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 잡고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예수는 정통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지만,

          실은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며 하느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예수는 다윗이나 아브라함마저도

         뛰어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3,9; 21,41-46참조).

당시 유다교에서 그 인물들이 갖는 비중을 감안한다면

        이는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루가는 : 책머리가 아니라 3장에 예수의 족보를 배치시켰다.

               집필의 후원자인 데오필로에게 바치는 글(1,1-4)과

               예수의 탄생과 유년기 이야기 하나(1,5-2,52),

               그리고 세례와 성령 강림과 유혹에 대한 보도(3,1-21)를 섭렵한 후,

               본격적으로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때에 족보를 배치시켰던 것이다.

 

이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놀랍게도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 이르고 있다(38절).

        예수가 갖는 의미를 인류 역사 전체에 빗대어 본 것이다.

 

․요한복음은 :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었다.”(요한 1,1)는 단정적인 말로

                    복음서의 처음을 장식했다.

      예수 사건의 시작은 천지창조 이전인 태초였으며

             예수는 곧 하느님이라는 말인데, 실로 엄청난 정체 설정이다.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에

               그리스도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 하겠다.

 

3. 예수는 누구인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 예수의 정체에 대해

          교리로 정착된 고백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부활했으며, 하느님과 같은 분이자,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1세기는 : 아직 예수의 정체가 통일되거나 확정되지 않아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던 시절이었다.

우선 가장 원시적인 정체 설정은 : 선포문에 있는 대로

      죽음, 부활, 재림 등 ‘십자가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선포는 전적으로 (바울로를 포함한)

          유랑선교사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마르코는 : 예수 사건을 공생애의 시작인 세례로 소급시켰고,

마태오는 :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

루가는 :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

요한은 : 태초까지 예수 사건을 범위를 넓혀 놓았다.

⇒그리스도론의 어떤 궤적을 감지할 수 있는 정체 설정들이다.

    특히, 작품들이 집필되었던 때와 병행시켜 보면

             그 궤적이 더욱 뚜렷해진다

 

(바울로의 편지 : 40-50년대 / 마르코복음 : 60-70년대 /

마태오와 루가복음 : 80-90년대 / 요한계문헌 : 90-110년대).

이를 통해, 우리는 이른바 고등 그리스도론으로 발전되는 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예수의 정체 설정은 물론 복음서 작가 혼자만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주 신중하게 예수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의견들을 수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 한 50-60세쯤 접어들어 이제 세월도 무르익고

           생각도 거의 정리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의 일생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말이다.

                                                       (「성서와 함께」 박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