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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의 예배의식(예배는 어떻게 드릴까?)

윤 베드로 2014. 10. 12. 18:44

☆1세기 교회의 예배의식(예배는 어떻게 드릴까?)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

        예수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분이며,

        그들의 모임이 참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다교와 독립해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 신약성서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를테면

①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유다교 회당에 들락거렸고,

②안식일을 지켰으며(마태 24,20),

③제단에 예물을 바쳤고(마태 5,23-24),

④예루살렘 성전에서 신앙생활을 했다(사도 3,1; 5,12).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예수는 공생활 기간에 비록 제도권 유다교와

          심각한 마찰을 빚기는 했지만 철저한 야훼 신앙을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는 안식일마다 회당을 찾았으며(마르 1,21; 3,1; 6,1),

        축제 때면 꼭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분이 아닌가!

 

⇒그러니 아마 상당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유다교 내에서 整風運動을 일으켰던 분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종교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들이 사도행전에 나와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나누고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2,42),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했다”(2,46).

 

⇒사도들의 가르침, 기도, 친교(코이노니아), 찬양 등,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디에서 그 같은 종교의식을 본따 왔을까?

   한 걸음 물러나 유다교의 회당 예배를 살펴보도록 하자.

 

1. 회당예배

유다교의 회당 예배는 :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①하나는 의식적인 부분으로,

            ‘셔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고백

            ‘18조 기도문’이 포함되고,

 

②다른 하나는 교훈적인 부분으로,

         성서를 읽는 ‘독서’와 그에 대한 ‘해설’이 포함된다.

 

⇒*‘셔마 이스라엘’은 : 하느님을 찬양하는 문구를 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신명 6,4-5만 옮겨보면,

      “들어라 이스라엘아,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이다.

 

*‘18조 기도문’은 : 18개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간구가 끝날 때마다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그리스도교와 관련해 특히, 12조의 ‘이단 배척’이 중요하다.

 

*다음 순서인 ‘독서’에서는 : 매주 정해진 본문을 읽어 나간다.

          예수 당시에는 아람어로 번역된 ‘탈굼’이라는 성서를 사용했고,

          율법(토라, 혹은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한 부분을 각각 낭송한다.

 

*이어서 본문에 대한 ‘해설’(미드라쉬)이 뒤따른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어느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여해

         예언서를 읽었으며(독서)

         그에 대한 해설을 했다고 보도한다(4,16-21).

  그런데 본문이 마침 메시아 예언(이사 61,1-2)이었고,

            예수의 해설은 “이 성서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단 한마디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포한 셈이었다.

 

⇒1세기 교회의 예배 의식에 관해서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보도가

           워낙 제한적이라, 원형의 사실적인 복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회당예배와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는데,

              바로 찬양과 기도와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의식이 회당예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부분이다.

   게다가 회당에 세명의 회장단이 있다는 점과

            예루살렘 모교회의 세 기둥(베드로, 야고보, 요한 ; 갈라 2,9),

   그리고 유다교의 빈민구제 제도와 ‘헬라 과부의 박대’를 다룬

              사도 6,1-6을 비교해보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리스도 교회가 전체적으로 유다 회당을 본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하기는 그리스도인으로 갓 태어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딱히

             본을 삼을 만한 데가 달리 있었겠는가?

   이제 사도행전이 전하는 예배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2. 만찬례

그리스도인의 예배의식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은 :

           당연히 예수에 관한 것이었고,

           이 자료들이 모여 후에 복음서로 편집되었다.

기도는 : 재림 기원(‘마라나 타’ : 1고린 16,22; 묵시 22,20)과

            박해에서 구해 달라는 내용(사도 4,23-31)이 주종을 이루었다.

친교는 : 구체적으로 ‘소유공동체’일컬으며(사도2,43-47 ; 4,32-37 참조),

공동식사는 : 이른바 애찬(愛餐, 아가페 ; 1고린11,17-21참조)을 의미한다.

예배모임은 : 유다교의 안식일 다음날인

                 토요일 저녁에 이루어졌다(사도 20,7).

 

⇒1세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들의 희망은 날개를 달았고,

           재림 기대로 가슴 벅찬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신앙을 함께 고백할 場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의 정기적인 모임이 구성되었으며,

           그 모임의 형식은 이미 익숙했던 유다 회당에서 따왔던 것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회당 예배가 가톨릭 미사와

          놀랍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분이 있을 것이다.

신앙고백인 ‘셔마 이스라엘’은 사도신경에,

      ‘18조 기도문’은 주님의 기도에, ‘독서’는 독서에,

       ‘해설’은 강론에 비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회당 예배와 구별해 진정한 그리스도교 예배로 만드는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빵을 나눔’, 곧 만찬례였다.

사실 예배 형식은 회당 예배에서 얼마든지 빌려왔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인 만찬례는 유다교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독특성을 가진다.

도대체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바뀐다는 발상 자체가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일 아닌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특징은 그처럼 예수 자신에게 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렇다 할 예배 형식이 없어 유다교에서 슬쩍 빌려왔더라도,

           교회 건물이 없어 교우들집을 옮겨다니며 초라한 모임을 가졌더라도,

           3일이 멀다하고 지도자들이 잡혀가

제도권 유다교의 박해를 받았더라도(사도 4.5.6장 참조),

          그리고 심지어 ‘나자렛 도둑놈 떼’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해도,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요한 4,21).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박 태식,「성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