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성장(로마제국시대)
*예수님의 공생활을 예수 사건이라 하고,
이 사건을 바탕으로 생겨난 공동체의 움직임을
예수 운동이라고 한다.
*예수 운동은 : 유다교 안에서 고유한 신앙 공동체의 성격을 띠면서
그리스도교로 발전하였다.
⇒처음에 예수 운동은 :
①예루살렘에서 12제자를 비롯한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출발하였으나,
②바울로와 같은 걸출한 선교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초세기 말엽에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멀리 로마에까지 퍼져 나갔다.
③2세기 중엽에 예수 운동에 가담한 이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非유다계 헬라인들이었다.
*예수 운동의 창시자에게 붙여진 이름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
'기름부음 받은 이’, 히브리어로 '메시아'이다.
⇒따라서 본래의 뜻대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가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그리스도는 이제 그분에게 붙여진 단순한 칭호가 아니라
그분의 고유한 이름(예수 그리스도)이 되었다.
*예수 운동(원시 그리스도교) :
①율법과 할례를 중요시하던 유다교의 틀 안에 있을 때나,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전례에 다 같이 참여하고 있을 때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②그러나 제 1차 유다항쟁(66-70년)의 결과로
둘의 공동 기반인 성전과 그곳의 전례가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에 율법과 할례에 無智하거나
별 관심이 없는 이방인들이 대거 영입해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교는 전통 유다교와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③특히 70년 이후 정치 종교적 제도에 집착하던
유다교의 다른 파당들이 몰락한 뒤에도
살아남은 바리사이파와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갈등과 대립은
그분 공생활 시절의 상황이라기보다
복음서 저자들의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바리사이파는 : 성서와 구전 율법에 정통한
위대한 스승 랍비들의 가르침에 철저히 의존하였다.
*제1차 유다 항쟁을 거치면서도 바리사이파(랍비 유다이즘)와
신생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공통 요인들이 있다. :
①이들은 조직을 갖추어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았고,
②70년에 로마인들이 파괴한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사두가이파처럼 성전 자체에 삶의 기반으로 삼지 않았다.
③둘 다 일정한 장소에 뿌리를 둔 체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었던 하나의 운동이었다.
④신도들에게 참 이스라엘임을 강조하면서도
율법 또는 구약의 가르침을 세상의 변화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⑤둘 다 다음 세상에서의 응보사상과 영원한 구원,
자선과 愛德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런 요소들 덕분에 로마 제국의 관리들은 :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쳐두면,
랍비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를 체제에 도전하고
제국의 안보와 질서를 해치는
위험한 세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젤롯파의 줄기찬 반란과 항쟁에도
유다교 자체를 금지하거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제2차 유다 항쟁(132-135년)이 끝난 뒤에는 :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다인들에게 할례를 금지시켰으나
그의 후임자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138-161년)가
이 금지를 철회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도 유다교의 한 파당으로 인식되는 한
유다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로의 변호 연설들을 통하여
누차 부각시키려 한 것도 이 점이다.
*그런데 초세기 말엽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완전히 갈라져 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세기 초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교는 어떤 기존의 종교와
연결되지 않은 파당으로 드러난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한 파당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합법적 종교인 유다교의 그늘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더 이상 안전하게 지켜 나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네로 황제 때부터 로마인들은 :
제국에 닥친 악과 불행의 탓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와
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아서
제국에 재난이 닥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써 신들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고
제국에 다시 번영을 가져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황제 숭배는 : 자신을 '주님이요 神'으로 떠받들게 한
도미티아누스 시절에 극에 달했고,
그것이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에서 강요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묘사와는 달리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로마 제국에 조직적이고
전면적으로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트라야누스 시절에 :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실천을
황제의 명령으로 금지한 것도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 그리스도교는 눈에 띄게 성장한 반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간헐적인 박해가 더 자주 더 넓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최후의 박해, 그러면서도 가장 큰 박해는 :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283-305) 치세 때에 시작되었다.
⇒박해의 손길은 그리스도교의 요람인 팔레스티나에까지 뻗쳤다.
305년 디오클레시아누스가 황제직을 포기하고
사두(四頭) 통치 체제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안정된 후계자를
얻기는커녕 제국을 엄청난 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경쟁자들 사이에서 20년 가까이 황제직을 얻기 위해
內戰이 계속 되었다.
*마침내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아 다리 근처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정적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하여 西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어서 324년 東西 로마 전체의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
①337년에 서거하기까지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②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하였고,
③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주도하며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처지에서
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바뀌었고,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자가 아니라 선포자가 되었다.
<성서입문, 한남성서연구소, 정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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