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시편 공부

제137편 바빌론 강가에서(1절)

윤 베드로 2023. 1. 4. 19:57

137: 시온의 노래,

바빌론을 저주하고 주님이 그 나라를 보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저주 시.

이제는 유배생활에서 귀환한 것같이 보이지만,

            작가는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잡아간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부르란 것을 어떻게 거부했는지 그것을 회상한다(1-3).

유다인들이 노래를 거부한 것은 괴롭더라도 시온을 기억하는 것이

                   곧 즐거운 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6).

작가는 잔인한 에돔과 바빌론에게 타당한 벌이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다(7-9).

 

1. 이스라엘이 받은 모욕

1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2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3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4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5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6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9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137 :

이 시편은 외형적으로는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의 애국심을 노래한 시이다.

물론 여기 애국심 이면에는 신앙이 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137,1).”

여기 시온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시온은 때로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언어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택함 받은 백성이고,

            이로 인하여 복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온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었고,

            항상 예배자들로 넘쳤고 그들의 찬양소리와 기쁨으로 넘쳐 있는 곳이다.

이처럼 시온은 장소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축복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온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진노하심으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결국 시온을 잃어버렸다.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살며 당한 고통스런 삶을 계속 말하고 있다(137,2-4).

그들은 바빌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흥을 위해 시온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지만

             “어떻게 거룩한 시온의 노래를 그들의 흥을 위하여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버드나무에 자신들의 수금을 걸어놓은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시온을 잃어버림으로 인하여 그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잃어버렸다.

시온에 살 때 그들은 하느님께 예배 들일 때마다 수금을 타며

            시온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는 그 수금이 필요 없게 되었고

            또한 시온의 노래도 더 이상 부를 일이 없게 된 것이다.

5-6절에서 시인은 反意的 용법을 통하여 시온을 잊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오른 손의 재주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는 의미고,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시온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시온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시온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온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된 것이다.

 

또 시인은 예루살렘을 파괴한 에돔과 바빌론을 저주하고 있다(137,7-9).

특별히 에돔은 직접적으로 예루살렘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주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시기의 대상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의 황폐함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돔과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반목은 에사우와 야곱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이런 갈등은 역사 가운데 계속 되었다.

여기 예루살렘을 파괴한 자로 에돔을 말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바라는 모든 자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처럼 에돔을 저주한 다음 바빌론을 저주했다.

바빌론은 실제로 예루살렘을 파괴한 자들이고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빌론은 마땅히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바빌론에 대하여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라고 말함으로

             바빌론을 파괴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계속하여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더불어 복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 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 고통은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우리는 7-9절의 저주를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