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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5)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느헤 8,3)

윤 베드로 2019. 1. 12. 19:35


율법이 있는 한 하느님 백성은 영원하리니


▲ 율법을 가르치는 에즈라.


어느 날 통일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동안 갈라져 있던 이들을 무엇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형제 하나를 아주 어렸을 때 잃어버렸다가 어른이 되어서 찾았다고 합시다. 그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50년 동안 유배지에서 살다가 돌아온 이들과 같은 기간을 이스라엘 땅에 머물렀던 이들이 있고, 자신이 살던 땅을 잃어버린 이들과 남들이 살던 땅을 차지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뒤죽박죽이고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습니다. 임금도 없습니다.


임금이 있어서 하나의 왕국으로 묶을 수 있었다면, 그래도 그 상황에서 임금 노릇 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어떻게든 손을 써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하나의 왕국도 아닙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때에 공동체의 구심점이 된 것이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성전 재건을 위해서는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의 활동이 중요했지요. 그 역사가 에즈라기의 앞부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국민이 단합하고 국력이 남아돌아 당당한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온갖 어려움 속에서 정말 있는 힘을 다 모아 지은 성전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고, 옛 성전을 보았던 많은 노인은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에즈 3,12).


성전이 무너지면서 공동체도 와해되었다면, 이제 성전이 다시 지어졌다는 것은 이전과 같은 공동체가 다시 세워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에즈라가 예루살렘으로 옵니다(기원전 458년?).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그에게,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라고 명했기 때문입니다. 에즈라는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페르시아가 모세의 율법을 이 지역에 대하여 국법으로 인정해 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의심스러운 부분들도 있어서 확실하게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유배에서 돌아온 공동체에게 성전이 눈에 보이는 중심이 되었다면, 율법은 내적으로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요소였습니다. 에즈라는 그 백성이 율법을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이민족과 결혼하는 경우들이 생겨났습니다. 에즈라는 이를 보고 크게 슬퍼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이민족 아내들을 내보내게 하는 조처를 단행했습니다.


글쎄요. 현대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지나칩니다. 하지만 유배에서 돌아온 공동체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비유가 그리 적절치는 않지만, 얼마 전까지 진돗개의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진도에는 다른 개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시각 장애인 인도견에게도 예외를 적용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논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 이것이 유배에서 돌아온 공동체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 전념하다 보면 다른 것은 놓치기 쉽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는 지상 과제 때문에 다른 많은 가치를 희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요나서와 룻기에서, 이 시기의 이스라엘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편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아직도 “큰 불행과 수치 속에”(느헤 1,3) 살고 있음을 걱정하여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한 일은 도성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에도 반대는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사람이 반대를 했습니다.


재건에 착수했던 이들은 한편으로는 성을 쌓는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격과 방해를 물리치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느헤미야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동족 안에서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고,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껏 바빌론 유배에서 해방되어 돌아와서는, 가난 때문에 다시 동족의 종이 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느헤미야는 이러한 사회 불의를 비판합니다.

이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칩니다. 온 백성을 모아 놓고 에즈라는 율법서를 읽어 줍니다. 백성은 그 율법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땅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백성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비통해 합니다.

하지만 에즈라는 이제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느헤 8,10). 언제까지 지나간 과거를 슬퍼하기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새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과거에 그들이 모세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아 멸망을 겪어야 한다면, 이제는 그 율법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도, 그 후에는 많은 이들이 본토를 떠나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되어도, 율법은 유다인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입니다.


수백 년의 세월이 더 흐른 다음 다시 성전이 무너지고 유다인들이 그 땅에서 쫓겨가게 될 때에도, 그리고는 이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살게 되었을 때에도, 율법은 그들을 구별해주는 표지가 됩니다.


 모세의 율법, 그것은 무너진 왕국을 대신하여 유다인들에게 정체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출처 : 평화와 착함
글쓴이 : 착한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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