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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The Holy Mountain of Korean "Baektu/Bulgun Mountain" <4부작>

윤 베드로 2016. 5. 23. 10:39








역사 속에 나타난 백두산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


게시일: 2015. 1. 1.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한반도뿐 아니라 만주ㆍ몽골에 이르기까지 성산(聖山)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이름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최초의 기록으로 중국의 『산해경(山海經, 기원전 2세기)』에서는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도태산(徒太山) 등으로 나온다. 요(916∼1125), 금(1115∼1234) 시대부터는 ‘장백산(長白山)’으로 불렸다. 

‘백두산’이라는 말은 『고려사』성종 10년(981)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삼국유사』(13세기말)에는 ‘태백산’으로 나온다. 단군신화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하고 있다. 혼용되던 이름은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백두산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산해경에 나오는 ‘불함산(또는 보르항산)’은 주로 요서나 몽골에서 사용한 것으로 ‘붉은 산(태양이 비치는 밝은 산)’의 다른 표현인데 오란산·오환산과 같은 의미다. 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성산을 뜻한다. 불함산은 또 황금의 산을 의미하는 ‘알타이산’의 다른 표현으로 항상 옮겨 다녀야 하는 유목민들의 정신적 지주인 알타이산의 모습과 흡사한 산들에 붙인 명칭이다. 이 가운데서도 백두산은 동북아시아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에게는 가장 큰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금·청을 건국한 만주인들은 백두산을 ‘궤리만싸엔아린(果勒敏珊延阿林山)’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큰 흰 산’ 또는 ‘긴 흰 산’이라는 말로 이를 한역(漢譯)한 것이 바로 ‘태백산’ 또는 ‘장백산’이다. 만주인들에게 백두산은 황금같이 빛나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알타이산의 또 다른 모습으로 고구려·발해·요·금·청나라 등에 건국의 정신적인 모태가 되었다. 만주어를 한역한 장백산을 현대 중국 정부가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명백하게도 장백산은 한족(漢族)의 용어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이 ‘백두(白頭)’라는 말에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백두’의 용례(用例)들을 보면, 주로 ‘벼슬 없는 백수’라는 의미로 민족의 성산을 부르기에 적합한 말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백두’는 노인(8세기 당나라 두보의 ‘춘망’), 백발(8세기 신라 부설거사의 ‘게송’), 대머리(12세기 말 고려 김의의 ‘영은사’), ‘벼슬하지 못한 사람(14세기 명나라의 ‘삼국연의’)’, 평민(15세기 말 조선 서거정의 ‘추회’) 등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13세기 이후 조선시대에 백두는 소과에도 합격되지 못한 실력이 없는 유학(幼學)을 이르던 말이었다. 특히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 백두는 천시받았다. 아무리 나이와 항렬이 높아도 벼슬한 친척에게는 예를 갖추어야 했다. 정승 앞에서는 설령 그의 친형이라도 백두라면 맞담배를 못 피웠고 앉는 자리와 밥상에도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백두산’이란 ‘백수의 산’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태백산 등 원래 이름을 백두산으로 바꿔 부르고 이를 방치한 것은 고려ㆍ조선조 유학자들이 백두산을 성산으로 여기지 않는 중국인의 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중화 의식’ 때문이란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민족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도 백두산의 이름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백두산은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의 원류가 되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의 정상이 늘 밝고 희다고 해서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 불함산(不咸山)등으로 불리웠고, 고대 신선도가(神仙道家)를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불로초(不老草)가 생장하고, 아울러 불사(不死)를 이룬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으로도 추앙을 받았다.1) 현재에도 백두산은 산정상에 담수호인 천지(天池)가 사계절 끊임없이 물을 흘려 보내고 있으며, 맹수의 왕인 호랑이가 생존하고, 자연산 산삼이 풍부하며 다양한 약초와 짐승이 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백두산은 고대 이래로 광활한 만주벌판의 동쪽에 우뚝 솟아 주변의 산을 압도하고, 동북 평원의 젖줄인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원류가 되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신앙으로 발전해왔다. 백두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구려는 본래 부여(夫餘), 농안(農安) 지역의 북부여(北夫餘)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연변지역인 동부여(東夫餘)의 일부세력을 이끌고 남하한 고구몽에 의해서 환인(桓仁)의 졸본부여의 세력을 흡수하고 흘승골성(紇升骨城)에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이어서 제2대 유리왕 년간(서기전 19-서기18년)에 백두산 자락인 집안(輯安)으로 천도하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대륙의 패권자로 성장하였다. 그후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부터 멸망하는 668년까지도 고구려는 백두산을 영유하면서 강력히 자주적인 역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고구려는 고조선, 부여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정통을 승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방 기마문화를 창조하고 주도한 중심국가였다. 또한 700여년에 걸쳐 만주대륙과 한국의 북부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중원의 한족(漢族), 북방 초원의 여러 기마, 수렵종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거치면서 한민족의 생존권을 담보하고, 음주가무(飮酒歌舞)하며, 발효식품을 먹고, 온돌생활을 하는 한민족 문화의 정형(定型)을 만들었다. 아울러 백제, 신라, 가야문화의 모태였고, 현재 한민족의 백두산 신앙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끼쳤다. 이글은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백두산 신앙을 살피기 위해 마련되었다.

고구려인들의 백두산 신앙을 살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론이 필요하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백두산을 숭배하였다는 1차적인 사료가 없다는 이유도 있고, 방증할 수 있는 부분적인 사료를 통해 개연성을 실증적으로 인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한민족과 백두산의 인연은 삼국유사 고조선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 기록에서 환웅천왕(桓雄天王)이 신시(神市)를 세운 태백산(太伯山)이 지금의 백두산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때의 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단군신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시기에 백두산은 민족의 발상지로서 널리 숭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 할 수 가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왕력편에 보면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이 ‘단군의 아들(壇君之子)’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아들(子)이란 후손(後)의 뜻이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평양은 선인왕검의 땅(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하였다. 이로볼 때 고구려에서는 자신들이 단군의 후손이라는 관념과 수도인 평양이 단군의 영토였다는 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2) 그렇다면 당연히 단군과 관련이 있는 백두산을 신성시 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셈이다. 


고려 성종 때 백두산 첫 기록, 만주족은 '장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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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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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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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이름의 변천과정과 유래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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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고구려 정신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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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한미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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