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바울로서간 공부

바울로의 개심에서 전도여행 직전까지 행적

윤 베드로 2016. 5. 4. 18:42

바울로의 개심에서 전도여행 직전까지 행적(33-45년)
 

바리사이인 바울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기에 율법을 비판한 예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교회를 박해하러 나선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로는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대표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했다고 한다.

그의 순교로 예루살렘에 있던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지중해 동부 여러 곳에서 피신하여 전도했다.
바울로 사도는 피해 달아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 및 사도가 되었다.
즉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돌변했다는 것이다.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순간에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의 개심은 그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때가 기원후 33년경(예수 돌아가신 뒤 3년 후)으로, 바울로가 전도여행(45년)을 떠나기 전까지

           약 10여년 동안(수련기간?)의 바울로의 행적은? : 
바울로는 개심한 다음 주로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노선을 따랐다.

곧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였다. 그는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 사도는 개심한 후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설교했다고 한다(22,16 ; 9,20-22).

 

그 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

1. 갈라디아서 1,17-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라비아(지금의 요르단 왕국=나바테아 왕국)로 떠났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3년 후에는 다시 게파를 만나보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라고 한다.
바울로 사도가 아라비아로 간 목적은 아마도 전도하기 위해 갔을 것인데,

           그런데 그곳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다마스커스로 피신한 것 같다.

 

2. 36년경 다마스커스에서도 이곳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바울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는 비상 수단을 동원해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름 동안 게파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고린토 2서에서 말하고 있다.

“다마스커스에서는 아레다 왕(기원전 4-기원 후 39년 통치)의 총독이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커스 사람들의 도읍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광주리에 담겨 성벽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려져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습니다.”

 

3. 그리고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나보고 나서

              바울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36-44년) 전도했다고 한다(갈라 1,19-24).
그 무렵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는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이곳으로 피신해온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은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하여

           혼성교회를 세우게 되자(사도 11,19-20),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 볼 책임자로

           키프로스섬 출신 보조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4. 그런데 이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울로를 초빙하여 1년(44-45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에만 전해져 오고 있다(11,19-26).

               그 신빙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5.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대도시였다.
당대 로마 제국 내에서 100만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지방 수도로서 50만 시민이 살았다.
로마제국에서 안티오키아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요즘은 안타키아라고 하며 인구는 약 20만이라고 한다. 바울로 시대의 유적은 전해오는 것이 없고,

           근교에 베드로 동굴 성당이 있는데, 이는 후대에 십자군들이 이런 전설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본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보면 :
①본디 사도들은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사도 10장에 예외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즉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르넬리오 가족에게 전도한 일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는,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사상 처음으로 공공연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결과 안티오키아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혼성교회가 생겨났다.
②사도 바울로가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지역에 광범위한 전도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 거점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두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지중해까지는 약 20km되며,

          이 두 곳은 오론테스 강으로 연결되어 있고 오론테스 강 하류에는 셀류기아 항구가 있다.

          바울로 사도가 바다로 여행할 때는 이 항구를 이용했다).
③안티오키아 주민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11,26).
④이 곳 주교님은 교부 이냐시오이다. 이냐시오 교부는 110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4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총 주교좌가 되었다.

    

               <바울로 친서 이야기(정양모) / 황모니카 수녀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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