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 임금이 발라암을 불러오다(22,1-21)
22,1 :
이스라엘은 아모리와 바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계속 가나안을 향하여 나갔다.
이제 그들은 모압 평지에 이르렀다.
모압 평지에서 그들이 陣을 친 곳은 요르단 건너편에 있는
예리고 맞은편이었다.
이 평지는 아모리인들이 시혼의 통치아래 요르단으로 퍼져 나와
그 땅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모압인들의 영토에 속하였다.
발락과 발라암에 관한 기사는 22-24장까지 계속 된다.
이것은 내용의 분량으로 볼 때 민수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발라암의 노래(예언)를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자를 세상의 어떤 사람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수고 외에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발락과 발라암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고자 연합했지만 결국 그들의 수고는 모두 헛되었다.
22,2-6 :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놀랐고 또한 그들로 인하여 번민했다.
4절은 발락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말해 주고 있다.
“미디안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소가 들의 풀을 뜯어 먹듯,
이제 이 무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을 모조리 먹어 버리겠습니다.”
모압인들은 이스라엘의 다음 공격은 자신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압 왕 바락이 세운 대책은 異敎의 마술을 빌려
이스라엘을 대항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마술로서 유명한 브올의 아들 발라암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에게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줌으로 자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싸워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22,7-14 :
모압왕 발락은 모압 원로들과 미디안 원로들을 발라암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원로들이 발라암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복채의 예물을 가지고 갔다.
발라암은 모압왕이 보낸 원로들로부터 그의 뜻을 전해 들었을 때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고 주님께 물어본 후 대답해 주겠다고 말했다.
9-11절은 그 밤에 발라암이 하느님과 교통한 내용을 말해 주고 있다.
발라암이 하느님께 모압왕이 보낸 원로들로부터 들었던 것을 말씀드렸을 때
하느님은 발라암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자들임을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발라암은 아침에 모압왕이 보낸 자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고 그들과 함께 가지 않았다.
원로들은 돌아가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모압왕 발락에게 전했다.
22,15-21 :
발락이 원로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그는 처음 보낸 원로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발라암에게 보내 더 좋은 조건들을 제시했다.
발라암은 그들의 제안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락이 비록 그의 집에 가득 찰 만한 은과 금을 준다 하여도,
나는 주 나의 하느님의 분부를 어기고서는,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22:18)”
발라암이 이렇게 말한 것은 참예언자의 모범이 된다.
참예언자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생명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고 또한 명하신 일을 가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발라암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어째서 구약에서 발라암은
거짓 예언자의 대명사로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오늘 밤을 여기에서 묵으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더 말씀하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22:19)”
어째서 발람은 “내 하느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락이 보낸 자들을 유하라고 했을까?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듣기를 기대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그가 순전한 마음에서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구했다면
하느님께서 그를 거짓 예언자라고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이런 물음을 생각할 때 발라암은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보다
발락이 제시한 화려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신의 처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발라암의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 밤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다면,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만 하여라.(22:20)”
하느님께서 분명한 뜻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탐욕으로 인한 것이다.
발라암은 탐욕으로 인하여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다. 이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모든 역사에서 거짓 예언자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발라암과 그의 나귀(22,22-35)
22,22-30.
발라암은 아침에 일어나서 모압 대신들과 함께 모압의 발락에게로 향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었고 탐욕에 이끌림이었다.
발라암이 모압으로 향할 때 하느님의 사자가 그를 막은 것은
바로 그의 길이 그릇 행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발라암에게 그 길을 가도록 허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자가 그 길을 막은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것들 모두가
다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께서 허용하시는 일들 가운데는 우리의 거역으로 인하여
징계하시기 위한 것도 있다.
“나귀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길을 비켜나 밭으로 들어갔다. 발라암은 나귀를 때려
다시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22:23)”
주님의 사자가 발라암의 길을 막고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서 있었을 때,
발라암은 그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태운 나귀가 보았다.
그래서 나귀는 주인을 구하기 위하여 길어서 벗어나 밭으로 피하였고,
이로 인하여 나귀는 무지한 주인으로부터 채찍질 당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번복하였다. 이후에 하느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발라암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내가 당신께 어쨌기에, 나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십니까?”
발라암이 나귀에게, “네가 나를 놀려 대지 않았느냐? 내 손에
칼만 있었으면, 내가 너를 당장 쳐 죽였을 것이다.” 하자,
나귀가 발라암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날까지 당신이 일생 동안
타고 다닌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당신께 이렇게 하는
버릇이라도 있었습니까?” 그가 “없었다” 하고 대답하였다.(22:28-30)”
나귀와 발라암 사이에 이루어진 일과 그들의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우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같게 한다.
하느님은 이처럼 우화와 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발라암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발라암의 길을 가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다.
22,31-35 :
하느님께서 발라암의 눈을 열었을 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발라암의 눈을 열어 주신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도록 하심이었다.
발라암은 하느님께서 눈을 열어 주심으로 자신이 가는 길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보게 되었고 또한
자신이 매로 친 나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한 짐승임을 알게 되었다.
발라암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사자에게 자신이 범죄 했음을 시인하고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돌아가겠다(22:34)”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자는 발라암에게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하라’고 말씀해 주었다.
그래서 발라암은 계속 모압으로 향했다.
발라암은 진정으로 돌이킬 줄 몰랐다.
주님의 사자가 그의 길을 가로 막고 있음을 눈으로 보고도
여전히 그의 마음이 모압의 발락에게 가 있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또 다시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역으로 인한 또 한 번의 허용을 얻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런 허용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이로 인하여 결국 그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원치 않으시는 일을 하였다.
발락이 발라암을 영접하다(22,36-41)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두 사람의 만남이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탐욕을 위하여 만났다. 그러나 이런 만남은
자신의 탐욕이 충족되지 않을 때 언제나 각자의 길로 간다.
실제로 발라암은 발락의 요청으로 왔고 대단한 환영을 받았지만
그는 발락의 요청에 대하여 어떤 것도 확신있게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발락에게 “이렇게 제가 임금님께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저의 입에
넣어 주시는 말씀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22:38)”라고
말할 수 있었을 뿐이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이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헛된 것이 되었다.
이 만남을 통하여 발라암은 어떤 것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오지 않았음이 더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다.
이 만남은 발락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만남으로 인하여 그의 실망은 더 커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만남 중에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만남만이
진정으로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41절은 발라암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것을 말해 준다.
발라암은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처럼
유일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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