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4장 공부
*4,3-31 : 주님의 말씀과 예언자의 말이 번갈아 나오는 詩 모음이다.
주님께서는 북에서 무서운 적군이 쳐들어오리라고 예고하시는 반면,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권고하기도 하고 백성을 위해 중개하기도 하며,
자신의 고통과 경악을 표현하기도 하면서 주님 말씀에 응답한다.
완전한 쇄신(4,3-4)
하느님은 거듭하여 유다에게 회개를 요청하셨고
또한 하느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말씀하셨다.
하느님께 인정하시는 진정한 회개란 묵은 땅을 갈고 파종하는 것과 같고
할례를 행하되 보이는 가죽을 베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농부가 파종할 때 묵은 땅을 갈지 않고 파종한다면
곡식들이 가시덤불의 세력에 눌려 결실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악한 행위로부터 돌이킴이 없이 말로만 회개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을 찢는 할례가 아니라면 할례의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위하여 여기 사용하신 두 가지 비유는
하느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으시는 회개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말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악한 것들로부터 돌이키는 행위로 하는 회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실제로 하느님의 백성들은 불의를 행하였기 때문에 넘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진다.
유다에 내린 경고(4,5-8)
예레미야는 이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회개할 것을 권고한 후
또 다시 그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예언자는 예언의 눈을 통하여 북방으로부터 한 나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죄를 범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유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도 알았다.
예언자는 이처럼 유다에게 다가오는 임박한 심판을 보았지만
아직은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유다가 그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권고한 것이다.
7-8절에서 하느님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보낸 나라들을
“숲에서 뛰쳐나온 사자”에 비유하셨다. 물론 이 사자는 바빌론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도구로서 바빌론을 택하시고
섭리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도록 하셨다.
7-8절은 유다에게 임할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말해 주고 있다.
유다의 대적들은 유다를 황폐하게 하려고 유다를 향하여 오고 있다.
하느님은 이들에 의하여 유다가 황폐하여
성읍들 가운데 주민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혼란(4,9-10)
예레미야는 유다에게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처럼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거짓 예언자들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런 유다의 모습을 보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사제들이 깜짝 놀라고
예언자들도 아연실색하리라”라는 탄식의 말로 표현했고,
또한 하느님께 대해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허용하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미혹을 받아 넘어지게 하심에 대하여
“참으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속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위협받는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권고(4,11-18)
“그때에 뜨거운 바람이 광야 헐벗은 언덕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4:11)”고 말하였다.
“그 때에(4:11)”는 하느님께 유다를 심판하실 때를 말하고,
“광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유다를 치기 위하여 준비된 바빌론을 말한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유다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을 죄로부터 돌이키시기 위하여 징계하셨지만,
이제는 그들이 권고의 말씀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에 징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심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구름처럼 올라오니 그의 병거들은 폭풍과 같고 그의 말들은 독수리보다 날래다(4,13).”
하느님께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하여 택하신 바빌론의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그는 구름 같이 올라올 것이고 그 병거는 폭풍과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처럼 빠를 것이다.
유다가 어떻게 이런 바빌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하느님의 뜻이 바빌론을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시고자 하는 것인데
어떻게 유다가 바빌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유다는 “우리는 불행하구나! 우리는 망하였다.”라고
탄식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4절, “예루살렘아, 네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네 마음에서 악을 깨끗이 씻어 내어라.
언제까지나 네 안에 악한 생각을 품어 두려느냐?”
이 말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기회였다.
왜냐하면 대적들이 유다를 치기 위하여 가까이 이르렀으므로 하느님께서 유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자 할지라도 그런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권고의 말씀을 들은 유다는 지금 절박한 순간이었다.
16-18절은 대적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음을 말해 줌으로 유다로 하여금
지금이 얼마나 절박한 시간인지 깨닫게 해 줌으로 회개하도록 권고해 주고 있다.
조국의 재앙 앞에서 예언자가 겪는 고뇌(4,19-22)
예언자는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에 취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며,
또한 그들이 곧 멸망하게 될 것을 내다보며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슬퍼하고 있다.
하느님 백성들의 신령한 귀가 열려서 전쟁 경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유다와 예루살렘처럼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21-22절에서 하느님은 대적들의 깃발을 보시고
또한 그들의 나팔소리를 듣고 계시지만 유다는 그것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無知하도다”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혼돈으로 돌아가다(4,23-31)
23-26절은 바빌론에 의한 유다의 패망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해 주는 말이다.
이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은 주님의 진노하심으로 무너졌다.
하느님은 끝까지 권고의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은 심판을 자초한 유다에게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4:30)”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그들 가운데 행해졌을 때 그들이 추구하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탐욕이 이끄는 대로 산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다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한다.
그러나 이들이 탐욕에 이끌려 행한 일은 결국 하느님도 잃어버리게 하고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도 잃어버리게 했다.
유다가 하느님을 멀리하면서까지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를 단장하기를 힘썼는데 하느님의 심판이 그들 위에 임하였을 때
이런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려다.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상실한 유다에게 남은 것은 고통스런 탄식뿐이었다(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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