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얌과 아사의 유다 통치(15,1-24)
아비얌의 유다 통치(15,1-8)
본문은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아비얌은 조상 다윗과 같이 하느님 앞에 온전히 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아비 르호보암을 본받아 악한 길로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를 유다의 왕으로 세워주신 것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이었다.
하느님은 다윗에게 예루살렘에서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느님의 약속을 가진 백성이 얼마나 복된 백성인지 말해주고 있다.
인간에게 전쟁은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이 범죄 했을 때 일반적으로 징계하시는
방식 중의 하나가 전쟁이다.
아사의 유다 통치(15,9-24)
아비얌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어 41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다.
아사는 다윗의 길을 쫓아 하느님 앞에 정직하게 살았다.
그가 왕이 된 후 힘써 한 일은 유다 가운데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온 나라 안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했고,
또한 우상숭배자들을 제거했다.
본문에서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냈고,
아세라 우상 숭배자였던 그의 친할머니 마아가를 폐위시킴으로
우상 숭배와 이교 문화를 단절시켰다.
이처럼 아사는 하느님 보시기에 정직히 살았으나 완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유다 가운데 우상과 우상숭배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산당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15:14).
산당은 우상을 숭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이었다. 특별히 엘리의 아들들이 부패함으로 인하여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후부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산당 예배가 성행했다.
비록 이 제단이 하느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환경적으로 볼 때
이교도 예배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므로 산당은 후에 이스라엘의 영적 예배를 혼합된 형태의 예배로
변질시키는 온상이 되었다.
또한 아사가 그릇 행한 일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북쪽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아람의 벤하닷의 군대를 용병한 일이다.
그는 아람 군대의 용병을 위하여 주님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취하여 아람의 벤하닷에게 보냈다(15:18-19).
왕일지라도 주님의 곳간에 있는 것을 함부로 취할 수 없다.
이것은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한 죄이고
또한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은 불신앙이었다.
아사의 생애 가운데 두 가지 연약한 것으로 인하여 그는 백성들 가운데
신앙회복을 위하여 시도했던 개혁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 자신도 끝까지 온전한 신앙을 지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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