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 성당, 손성문 보좌 신부님의 강의)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에 대한 이해
우리는 책이나 글을 읽는 것에 익숙하다.
글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는다.
수많은 정보 중에서 필요한 것을 취하기 위해 머리를 쓴다.
성서를 읽을 때조차 그런 습관이 작용한다.
무언가 지식이나 정보를 얻으려고 이성이 작용한다.
그러나 성서는 역사 서적이나 학문 서적, 문학 서적이 아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자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선 이성보다 감성이 작용한다.
구약시대엔 하느님의 직접 뵐 수 없었고, 소리나 말씀으로 만났다.
그런데 신약시대엔 그 말씀이 육을 취하셨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마지막엔 먹히는 음식이 되셨다.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 나머지 육을 취하셨고,
음식이 되어 하나 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접할 때엔
그 사랑을 느끼려 노력해야 한다.
단순히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을 낮추신 눈높이 사랑을 깨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 개념
라틴어인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 깊은 의미를 다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영적 독서, 거룩한 독서, 신적 독서, 성독(聖讀) 등으로 번역한다.
왜관분도회의 허성준 신부는 "성독"이 적절하다고 한다.
첫째, 그 자체로 성스러운 독서라는 의미를 지니며,
둘째, 성서 독서의 줄임말인 성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셋째는 성령에 의한 독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거룩한 독서"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Iectio는 "모으다, 필요한 것을 선택하다"란 Iegere 의 명사형이다. 그리고 divina 는
"하느님의, 신성한, 신적인 천주의" 라는 뜻이다.
즉 렉시오 디비나는 세속적 독서나 학문적 탐구 또는 신심서적이나
교리적 독서와는 전혀 다른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하고 정감적인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맛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관상적인 일치에로 나아가고자 함에 있다.
즉,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단순하고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자신의 전 존재로 한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읽고 들으며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초기부터 수도자들의 핵심적인 수행 방법이다.
2. 역사
교회 생활 처음부터 대략 1300년대까지
그리스도인에게 기도 체험이고도 일차적인 젖줄은 바로 성서였다.
대체로 교부들이나
중세의 스도승 저자들에게
'관상'은 애초부터 성경봉독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이후 종교개혁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평신도들은 성결을 접하기 어려웠다.
교회의 타락에 반발한 개혁자들이 교회 전통과 성사를 부정하고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만을 내세운다.
루터는 라틴어로만 되어 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익을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개신교는 비록 성사가 없지만 말씀에 있어서는 뛰어나다.
그러나 가톨릭은 그러한 충격을 개혁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단
전통의 고수로 대응하였다.
그래서 전례도 성경도 오로지 라틴어만 사용하였다.
사제들도 글을 잘 모르는 시대에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접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가톨릭에서도 많은 이들이 성경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성경이 기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성경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1) 기원
성경을 경건하게 읽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이전,
이미 유대 전통 속에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한느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모세의 율법서에
그분께서 살아계시며 실존하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공적인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을 자주 읽고 온 마음으로 경청했다.
2) 초대 교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독서*묵상*기도로 이루어진 유대교의 전통적인 방법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과
모범에서 모든 성경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3) 교부들
성경 독서의 방법은 기도와 하느님 체험을 위한 탁월한 길로서
많은 교부들이 실천했고
그리스도교 백성 가운데로 급속히 확산됐다.
오리게네스는 영성생활이란
성경을 읽고
이해하며
맛들여가는 생활이라고 보았다.
4)은수자, 회 수도자
이후 성경 독서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차츰 멀어지지만
수도 전통에서는 계속 이어나간다.
그들은 성경 이외의 다른 독서에 대해서는 베타적인 입장을 취했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독서가 기도의 준비이자
동시에 기도 행위 자체라고 보았다.
왜
.
냐
.
하
.
면
성경을 읽는 중에 이미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는 기도 중에 그분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후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수도원들은 하루의 중간이나 끝에
최소 2~3시간을 성경 독서에 할애했다.
베네딕토 역시 규칙서에서 수도자들이 2~4시간은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도록 배려했다.
11세기에 성 부르노는 오직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카르투시오회를 설립했다.
그 회의 9대 원장인 귀고2세가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를 체계적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12~3세기부터 렉시오 디비나는 위기를 맞는다.
온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되새기며 기도하기보다,
스콜라 학문의 영향으로 말씀에 대한 질의와 논증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독서, 말씀은 오랜 유배를 겪는다.
그렇게 사라진 방법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재발견하였고, 오늘날 다시금 확산되고 있다.
3. 방 법
앞에언급한 귀고2세의 책은 [관상 생활에 쓴 편지]라고도 한다.
여기서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을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의 네 단계로 이야기한다,
귀고는 마태오 복음 7장 7절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주실 것입니다.) 을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에 적용하여,
'독서 안에서 찾으면 묵상과 함게 얻을 것이고,
기도 안에서 드드리면 관상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엔조 비앙키는 여기서 착안하여
거룩한 독서를 다음과 같은 세부분으로 그리고 있다.
분명 네 단계이지만 기도 안에서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1) 준비 기도 : 성령을 청하기
"성령을 청하시오, 빛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을 청하는 이 기도의 순간은 '시작 기도'라는 형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각 개인이 하느님 말씀의 현존 앞에서
하느님의 숨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도
또 성경 안에도
함께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지금 내게 와 주십사 청함으로써,
독자는 우선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독서와 묵상의 단계
이미 기도하는 마음이 되어 이제 읽기 시작한다.
우선 중요한 것은,
마음에 드는 본문을 찾으려 뒤적거리거나,
손 가는 대로 아무데나 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례의 흐름을 따라 그날의 독서나 복음을 읽든지,
아니면 신구약에서 하나의 책을 선정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든지 해야 한다.
이른바 '연속독서'의 원칙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 본문을 두고 '이미 안다'고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체험의 수준에서 본문은 언제나 새롭다.
성서 본문은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어야 한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의 귀를 기울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의 깊게 여러 번 마음으로 '경청'하다보면,
본문의 객관적 메시지가 이전보다 더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온다.
이쯤되면
핵심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느끼는 구절이
마음에 더 깊이 와 닿아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 순간부터 자연스레 '묵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그 메시지가 '나에게' 무슨 뜻이 있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느끼게 된다.
어떤 구절이 내게 더 가까이 와 닿았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읽기와 묵상하기의 단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연상(聯想)'의 방법인데,
한 성서 구절이 상기시키는 다른 성서구절들을
본문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당 본문의 의미가 훨씬 더 생기와 구체성을 얻고 풍요로워진다.
이것은 '성경을 서경으로써 해석하는 원칙'에 입각한
이른바 '미드라쉬'의 독서법으로서,
이미 유다의 랍비들이 실천하던 방법이다.
이 방법의 근저에는
성경 전체가 사실 '단 한권의 책' 이라는 확신이 있다.
또 하나는 '되새김(ruminatio)'이다.
"독서가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것을 잘게 씹어 가루로 만드는 것" 이라고 귀고2세는 말한다.
이는 성경 구절을 기억(암기)해서
천천히 마음으로 반복하여 되씹고 되뇌는 것이다.
한 번 들은 말씀을 마치
내 몸의
일부로 만들기라도할 것처럼
마음속에 깊이 각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
영
적
으
로
먹는 것' 이다.
되새김을 통해 말씀을 머리보다 마음으로 더 깊이 알아듣게 되고,
말씀이 지닌 '맛'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에서 절로 진실한 기도가 샘솟아 나온다.
3) 기도(관상)의 순간
"기도 안에서 두드리시오. 관상으로 들어갈 것이다."
읽기와 묵상하기가 그리 명확한 경계를 지니지 않듯,
묵상하기와 기도하기 사이의 경계도 멍확하지 않다.
묵상이 깊이 진행되면서 독서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된다.
문자 속에 숨은 살아 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필립3 ,8)에는
표현할 깃 없는 '맛'이 있다는 것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된다.
묵상은 하느님 인식의 감미로움을
"일러주기는 하지만 전해주지는 않기"때문에,
그리고
"주님을 알면 알수록... 주님을 점점 더 깊이 알고자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에,
독자는 갈망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고 귀고2세는 말한다.
그리고 이 갈망으로 독자는 알아들은 메시지에 응답하기도 하고,
형언할 수 없는 탄식(로마8 , 26)으로 주님 앞에 그냥 앉아있기도 한다.
열망과 통회로 눈물이 솟기도 하고,
이웃을 위한 중개의 기도가 나오기도 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도 된다.
'관상' 의 순간은 우리의 노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
기도하기의 어떤 순간부터 관상이 시작 되는지도 앟 수가 없다.
앞에서 얘기한 어떤 부분은 이미 관상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클레르보의 성 베느나르도는 '밀씀의 방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말씀께서 "취하게 함으로써 깨어있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시는 이 단계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장 힘들기도 이려니와
불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귀고 2세는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독서가 표면과 관련된 훈련이라면
묵상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지성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갈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관상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없이 기도할 수 없고
기도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실감나게 묘사해 준 귀고2세는
거룩한 독서의 각 순간들이 빠짐없이 다 중요하다는 사실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실천적 경구로써 일깨워준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입니다."
성서는 겉 문자보다 속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 의미를 하느님 영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게 되면
모든 사건을 동일한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다.
모든 것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나아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관상의 눈을 지향한다.
"모든 일을 마음 속에 새겨 곰곰이 생각"하신
마리아께서 그 뛰어난 모범이시다.
거룩한 독서는 단순히 '좋은 영적 체험'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온 존재가 말씀 자체로 변하는 철저한
복음적 훈련여정, '거룩한 변모'의 여정을 겨냥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가 말씀 자체가 되어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내 삶과 행동과 사도직이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하고 자문해야 한다."
(마르티니 추기경)
숙제 :: 마르코 복음 1장 ~ 6장까지 읽기.
<참고 서적>
엔조 비앙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분도 출판사
서인석 : 말씀으로 기도하기, 성서와 함께
허성준 :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분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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