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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0. 유다교 당파-2 /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 신은근 신부

윤 베드로 2016. 8. 18. 20:10

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은 희랍의 지배하에 있었다.

다인은 마카베오 형제를 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BC 164년 성공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이 마카베오기다.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제관계급이 정치에 뛰어든다.

 

사두가이파 등장이다.

바리사이파 역시 전면에 나선다.

 

두 파는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 없었다.

구약성경을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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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가이파는 모세오경 즉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예언서와 교훈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경에 기록되지 않은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고 했다.

 

바리사이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 되었건 구전으로 전해졌건 모든 계율에 충실해지려 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문서와 구전으로 양분되어 전해진다며 사두가이파와 맞섰다.
바리사이는 히브리어 파라쉬(parash 구분하다)가 어원이다.

 

자신들을 페루심Perushim이라 불렀다.

직역하면 ‘분리된 자’란 뜻이다.

 

무엇으로부터 분리되길 원했을까?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이다.

 

레위기 11장부터 15장 사이에 등장하는 온갖 부정함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야훼의 축복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번째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과 희랍문화에 젖어 있는 민중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유다인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 흩어진 이들을 붙잡고 교육한 이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유다교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그들은 성전 대신 회당Synagogue을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게 했으며

현실의 상황에 맞춰 율법적응에도 융통성을 부여했다.

 

해외 유다인(디아스포라)을 존속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리사이파가 장악하고 있던 회당과 학교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자주 논쟁하셨다.

율법에 대한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에게 율법준수는 신앙의 목적이었다.

야훼를 사랑하는 길이었다.

 

철저하게 지킬수록 철저하게 섬기는 것으로 알았다.

이민족의 지배는 율법을 어긴 보속이라 생각했다.

 

법준수만이 다시 야훼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어울리며 마귀 들린 사람과도 접촉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율법준수의 방해자로 비쳤던 것이다.
바리사이파의 특색은 엄격한 율법준수와 함께 중산층을 포섭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유다교의 주류를 이룰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파였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뒤 바뀐 분이다.

 

사도는 서간에서 율법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신은근 신부

출처 : 평화와 착함
글쓴이 : 착한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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