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자료/카톨릭 교리

최양업 신부

윤 베드로 2015. 7. 4. 10:27

☆최양업 신부

 

최양업 신부는 한국의 두 번째 邦人 사제로

           12년 동안의 사목생활에서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한국사에서 별로 거론되지 않았던 분이다.

 

1. 최양업 신부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지방 다래골 (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 다락골)에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6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 최인주는 본래 서울에서 살다 박해를 피해 다락골로 낙향한 후 열심한 신앙 생활로 가정을 이끌었으며 복음덕과 영혼을 구하는 일에 전심 전력하고 모든 이를 한 형제자매로 여겨 그의 종들에게도 ?영감마님?이라 부르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의 부친 최경환도 그 가르침을 입어 곤궁한 사람에게 애덕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교우촌의 회장으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렇듯 하느님과 이웃 사랑은 겸손덕이 맺은 결과로서 이 집안의 정신이 되어 부친 최경환의 생애가 된 동시에 최양업 신부의 사목생활에서 주 영성이요, 사목생활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1) 한국 최초의 양학 유학생 최양업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후, 1836년 맨 먼저 입국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 무엇보다도 본국인 성직자 양성에 필요성을 통감하여 본국인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에서 가장 열심한 집안의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는데 이때 가장 먼저 지목 받은 소년이 바로 충청도 홍주 다락골의 최경환의 장자인 최양업이다.

최양업과 같은 시기에 선발된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방제 방지거와 함께 유 파치피코 신부를 따라 서울을 출발한 후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 내몽고, 중국 땅을 거쳐 6개월 만인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그 당시 마카오에 주재해 있었던 파리 외방전교회 구내에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 칼레리 교장신부, 르그레즈와, 리브와 신부 등에게서 수학했다.

마카오에서 수학하는 동안 민란으로 인해 마닐라로 피난 갔다 왔으며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등 몇 차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신학과 철학 그리고 서양의 근대 교육과정과 천주교 성직자로서 필수적인 용어였던 라틴어를 배우는 한편 포루투칼어, 영어, 중국어 등 서양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한시 바삐 조국의 동포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사제품을 받기 전까지 4차례에 걸쳐 조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시도를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드디어 1849년 4월 15일에 상해의 강남 주교인 마레스카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3일 의주 변문을 통해서 단신으로 귀국하는데 성공하였다.

 

2) 최양업 신부의 포교활동

 

조국을 떠난 지 13년만에 최양업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되어 귀국하자마자 중병을 앓고 있던 안 다블뤼 신부를 만나 병자성사를 드렸고, 병중에 있는 페레올 주교를 대신하여 그때부터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전라도를 비롯해서 경상, 충청, 강원, 경기 등 5도와 평안도 지방까지 답파하면서 성무 집행을 하였다.

그 후 최양업 신부는 조선 제 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주교의 명령으로 진천군 백곡면에 있는 동골 교우촌을 맡게 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장마철인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만 이곳에 있었고 그 외의 시기에는 전국 일대를 매일같이 전교 다니셨는데 하루에도 수십 리를 걸어서 다녔다.

이렇듯이 땀과 끈기로 이어지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멀고 험악한 공소 등, 어려운 지역의 전교를 맡아서, 해마다 5개 도에 걸쳐 있는 광활한 전교 지역을 돌며 한 마리의 양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사목정신으로 때로는 신자가 둘이나 셋밖에 없는 공소도 마다하지 않고 방문하였고, 다섯 가구의 신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사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 특히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다녔고 도한 방인 사제로서 한국인의 사정과 성격을 잘 알았기에 신자들의 온갖 희노애락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며 많은 경험을 통하여 교우들과 진실한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최양업 신부를 얼마나 은혜롭게 생각하며 따랐는지 마치 목마른 양떼들과 착한 목자의 정경을 연상케 했다.

이러한 사목활동 중에서도 저술활동에 힘쓴 그는 다블뤼 주교가 펴낸 「한국천주교회사」의 집대성에 많은 공헌을 했음은 물론이거니와 고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병오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 외에도 연중 주요 기도서인 공과의 번역도 1858년에 끝냈다.

 

3)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최신부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없었고 종교적인 모든 행사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만 이루어야 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교리 지식을 전달할 방법을 목적으로 천주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간단하고 명확하게 간추려서 일반 신자들이나 아동 및 부녀자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4‧4조의 가사체로 만들어서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의 전통 사상과 서민의식에 알맞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토착화한 형태의 가사로서 일종의 성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길의 사나이’라고 불릴 정도로 12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경상도로 전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병에 걸려 1861년 6월 문경에서 선종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죽음에 다블뤼 주교는 너무나 애석해 하며 ?최신부의 뛰어난 덕행,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 그의 재능과 뛰어난 재질, 무슨 일이든 해내는 능력 등으로 미루어 현재로서는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며 그의 유덕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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