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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

윤 베드로 2014. 11. 5. 16:22

★쿰란

 

1. 쿰란 발굴의 역사 :

 

․1947년 봄, 타아미레라는 유목민 부족의 한 젊은 양치기(이름은 무하메드 에드 디브)

            염소 한 마리를 뒤쫓느라고 사해 연안에 솟아있는 암벽을 헤매고 있었다.

염소를 뒤쫓다 지친 젊은이는 어느 바위굴 입구에 앉았다가

           무심코 돌을 집어 굴속으로 던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옹기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이는 감히 혼자 들어갈 염두를 못 내고 이튿날 사촌을 데리고

              그곳을 다시 찾아와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깨진 항아리만 아니고

              온전한 채로 뚜껑이 봉해진 항아리 8개를 찾아냈다.

 

그 중 하나에는 3개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 따위 낡은 가죽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들의 숙부가 참견을 하여 뭔가 옛날 것이라고 느껴

         베들레헴의 한 시리아계 수도원의 원장에게 보였다.

원장은 시리아어로 된 옛날 수사본이라고 생각하여

         조사해본 결과 그것이 즉시 확인되었다.

 

․그 동안 두 젊은 양치기는 갑자기 탐험가가 되어

            사해 부근의 암벽 지대를 계속해서 탐사하였다.

그 일대는 아랍어로 '와디 쿰란(Wadi Qumran)’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예루살렘에도 비밀리에 암거래 형식으로

          고대 사본과 단편들이 나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본 두개가 어느 학도의 손에까지 들어갔고

              즉시 비상소집을 하였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의 정치 여건이

           면밀하고 침착한 탐사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였다.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시의 일부분을 요르단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 새 발견지는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이른바 6일 전쟁 전까지

         아랍 왕국인 요르단 통치하에 있었다).

그 동안에 고사본의 광맥을 찾아낸 베두인 사람들은 탐사를 계속했다.

1951년에는 조금 남쪽에 있는 와디 무라밧(Wadi Murrabat) 부근에서도

               다른 고사본들을 찾아냈다.

 

․드디어 베두인 사람들과 도굴자들과 학술단체 발굴단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학술단체는 동굴을 제 집처럼 환하게 아는

                 광야의 유목민보다 언제나 한 발 늦곤 하였다.

50년대에 쿰란 와디가 흐르는 입구의 사해 정면에 있는 동굴들과

              암산 지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의 단체가 만들어져

         베두인 사람들이 찾아냈거나 전문가들이 발굴한 자료들을 연구하였다.

자료탐색은 60년대 말까지도 계속되었으며,

       동시에 발견된 자료와 원문을 분류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2. 쿰란의 사본들 :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열 개가 넘는 동굴과 다른 장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사다 요새를 탐사한 결과,

             많은 사본(400여 종)이 발견되었다.

        성서, 정경에 들지 않는 책들, 이미 알려졌거나 처음 보는 자료

         이 사본들은 주로 히브리어로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본과 아람어본도 있었다.

․에스델서를 제외한 구약성서 각 편이 나왔다.

․거의 완전한 이사야서 사본이 둘 나왔다.

․사해 부근에서 살았던 어느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사본들 :

        공동체 규칙서, 찬미가, 찬송집, 성서 주해서,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에 대항하는 전쟁의 책 등.

 

⇒이런 귀중한 문헌들이 정작 발견되어서 현대식 박물관에 진열되기 전에는

           2천여 년 동안 고스란히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 유물들은 건조한 기후, 쿰란인들이 정성 들여 만든 容器,

          그리고 황량하고 인적 없는 사막이라는 조건 덕분에

           BC 1세기 전까지 소급되는 유대인 종교서와 성서 사본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었다.

 

3. 쿰란 사람들의 역사

 

사본의 연구와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 : 쿰란의 폐허)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①사본들은 : 광범위한 유대교 내부 개혁운동에 관한 것으로,

                     어느 공동체의 서고에 속해 있었다.

   이 운동은 성전 예식을 좌우하던 예루살렘 사제 집단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②이 공동체는 : 역사가 요셉 플라비우스와 小플리니우스에 의해

       '에세네'라고 불리던 집단과 아주 유사하다.

        이 집단은 사막에 은거하여 고행하면서

            종교적으로 임박한 세상의 종말을 기대하였다.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약 4,000여 명에 달하는 독신자들로 추정된다.

 

③이 개혁가들은 : BC 2세기에 쿰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직전까지 존속했다.

       수도원은 AD 68년경에 로마군단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사람들이 수도원을 버리고 달아나기 전에

              자기들의 수사본을 근방 동굴에 숨긴 것이다.

 

④쿰란 공동체는 : 경제적으로 자립하였으며,

            규칙서 사본과 그곳에서 발굴 건축유적으로 미루어

            이 수도자들의 생활양식과 활동방식을 짐작할 수 있다.

 

⇒ 노동, 재산의 공유, 정결예식인 목욕, 공동식사, 기도, 성서독서,

     종교집회, 분명한 위계질서를 갖춘 확고하고

     엄격한 조직적 구조 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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