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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절두산 순교 성지 (서울)

윤 베드로 2014. 10. 19. 23:29
절두산 순교 성지 (서울)




                               절두산 성지, 120 m 항공사진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현재 서울 양화대교의 북단쪽에 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절두산 기념 성당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절두산 성지, 60 m 항공사진



                                           절두산 성지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

      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

      저 자르 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

      들이 산수를 즐 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

      었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 

 

 

 

      로 더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

      했다.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성지, 김옥덕 한국화전, 한지에 수묵담채, 49x59cm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산 성지 성당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 

   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 

  과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 

     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섰다.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 

  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 

     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절두산 성지 성당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2010 移轉 후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移轉 전 모습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
(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이다.




                                                성모상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 (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우측), 박물관(좌측)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십자가14처

 

                                             성당 제대





                                                  제대



                                                  제대



                                          성당 성모자상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성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성인들의 유해"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

   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

   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

   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

            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

  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

            에서 가슴 뭉클하다 .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부활의 집(납골당)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성모자상



성모상



절두산 성지, 김철호 사진전, 2006년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동상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

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동상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한국 방문 기념상



                                            최양업 신부상



                                         김대건 신부상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 기념비  

 

 

       한 시대를 살고 간 큰 인물들은 그 자취를 뭇사람의 가슴에 새기고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가슴에 새겨진 그 인물을 다시 돌에 새겨서

      아름다운 그들의 삶을 기린다. 우리 교회가 대희년을 지내던 2000년도 8월

      부터 11월까지 4개월 간에 걸쳐서  절두산에서 순교한 분들 33명은 자신이  

      순교했던 그 자리에 높이 8m, 두께 4m, 폭 10m, 총 무게 250톤이나 되는 돌 

      에서 다시 태어났다. 절두산 순교 현양비가 세워진 것이다. 믿음을 위해서 생 

      명을 바친 그분들은 상주(尙州) 산 화강암에 재현되어 나갔다. 

      상주 쑥돌은 수정(水晶)이 자라 기포가 많고 큰 구멍도 가끔 있다. 흑운모(굵 

      은 검은점)와 검은 긴구름(우라) 무늬도 있지만, 붉은 색을 띠는 홍장석 입자 

      가 굵어 돌의 색깔이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띠워 순교자의 기념탑을 제작하 

      는 소재로 적당했다. 이러한 돌은 섬세한 조각보다는 거친 터치의 작품에 더  

      잘 어울린다. 이 돌의 외곽에 드로잉 선들의 변화를 주면서 단순한 면을 강조 

      한다면, 오히려 소박한 인상이 강해지고 붉은 돌은 순교자 얼굴에 빛을 더해  

      주리라. 현양비를 제작하던 4개월간 컴퓨터 조감도를 4번 작성했고, 여덟 차 

      례에 걸쳐서 모형을 제작했다. 그 작품의 초점인 절두상 (切頭像)을 확정하는  

      데에 네 차례의 모형작업을 시도해야 했었다.

      이 작품은 상주(尙州) 부근의 화북 면소로부터 2킬로미터 정도가 떨어진 외딴  

      산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작품의 제작을 대부분 채석장 현장에서 진행했다.  

      채석장의 오두막에 기거하며 4개월을 지냈다.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고 간이  

      화장실 마저 없는 오지에서 불편을 감수하면서 작품에 전념했다. 늦장마와 태 

      풍, 그리고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추석 때문에 작품 제작에 애를 많이 먹었   

      다.  장마 때는 채석장 인근의 배부른 개울소리가 요란했다. 초가을의 태풍이  

      몰아칠 때 그 엄청난 폭풍 때문에 작업장의 텐트를 고정시켰던 못이 빠져 총알 

      처럼 석공의 귓가를 스쳐갔던 아찔한 장면도 이젠 거짓말처럼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채석장 맞은쪽의 견훤산성 돌담이 보이는 하늘 높은 날이면, 속리산의 가을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함을 금할 수 없었다. 가끔은 내 작품에 쓸 돌을 산 

      봉우리를 폭파해서 산허리에 있는 작업장까지 중장비로 굴려 운반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하는 그 현장에서 나는 이 자연파괴가 과연  

      아름다운 창조의 시작일 수 있을지 의문을 갖기도 했다. 250톤이 넘는 현양비 

      를 서울로 옮길 때는 차의 하중을 초과해서 중량위반을 감수해야 했다. 큰돌을  

      운반하기 위해 차폭을 늘렸으므로 차선을 위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현양비 

      는  야밤중의 도둑질처럼 한 밤에 조심스럽게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음  

      졸인 기억은 아마 꽤 오래갈 것이다.
      < 이춘만(크리스티나, 조각가), 순교자 현양, 제 62/63호(2001년 4/5월),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기념비와 성당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가운데 자리잡

     은'큰칼' 모양의 작품은 주탑(主塔)이다. 주탑의 정면에서 오른쪽에 있는 우측탑

     (右側塔)에는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있다. 이 탑의 이름은 '절두탑'으로

     려도 좋을 것이다. 이는 이곳에서 순교가 있었음을 말함과 동시에 이곳의 지명이

     절두산임을 암시해준다. 주탑의 왼쪽에 있는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

     으로 제작되어 이곳에서 순교했을 또 다른 무명 순교자들을 조각해 넣었다. 주탑

     과 우측탑에는 모두 33명의 순교자들이 늙지도 변하지도 않을 화강석 육체를 가

     지고 다시 태어났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의 주탑(主塔)은 높이 8m, 가로 5m, 세로 4m 중량 150톤

     이다.기념탑의 상부에는 조선시대 죄수들이 목에 썼던 형틀인 '칼'을 상징하는

     조각을 했다. 그리고 주탑의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그 순교자

     들의 머리 위에는 아치(arch)형으로 이름을 새겼다. 그들의 인체는 내가 그동안

     제작해 왔던 4등신 또는 5등신 비례를 적용했다.  이 비례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특히 중히 여겼던 단순 질박한 성격을 담아 보고자 했다.

     순교자들이 모두 엇비슷한 신장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통

     해서 하느님 앞에 '평등한' 인간으로 이미 태어났음과 이제 순교자로서 성인들

     과 '대등한' 기꺼움을 하늘나라에서 누리신다는 뜻을 함께 상징한다


     주탑의 오른쪽 옆면에는 '전구(轉求)하는 성모'를 선으로 처리하여 새겨 넣었다.

     '전구하는 성모님'의 변형(deform)된 손에는 인위적인 테크닉이 최대한 절제되

     었다.이 절제감으로 번잡한 현실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치유되는 이미지를 제

     공하고자 했다. '전구하는 성모'를 조각한 화강석은 자연의 본질 자체이다.

     이로써 화강석에 새겨 넣은 반구상(半具像)의 모습에서 기도하는 마음, 세속적

     일상에서 벗어난 마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주탑의 왼쪽 옆면은 '부활한 예수'를 각인했다. 이는 가로 1m 40cm, 세로 2m    

     40cm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은 성서의 중심 내용인 동시에 순교자들이 믿었던

     신앙의 핵심이었다. '부활한 예수'가 자유를 주는 단순한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

     내 준다.이 부활한 예수 앞에서 우리 자신은 새로운 화두를 계속하여 자신의 미

     숙함을 성숙시켜 나갈 것이다. 형틀을 받치고 있는 주탑의 뒷 기둥의 옆쪽에는

     높이 8m에 폭 3m 60cm 두께 1m가 넘는 '전구하는 성모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새겨 넣었다.


     주탑의 뒷 기둥에는 현대 추상화를 조각화해 보았다. 그 곧게 뻗은 기둥은 형태

     가 없는 형태, 있었던 형태가 사라진 곳, 마음대로 자유로운 창의의 언어가 오가

     는 통로를 상징하고 있다. 주탑의 재질은 바윗돌이다. 이는 자연의 인내와 침묵

     을 담고 있어, 자연으로 가는 정확한 길을 안내해 주며, 설교 없는 설교를 하고

     있다.


     주탑의 전체는 모래 위에 파도가 만든 모래톱 자욱처럼 처리했다. 그리하여

     연에 바탕한 그 자욱(터치)을 소재로 하여 현양비를 캔버스로 삼아서 그 공간에

     그림을 그리듯 조각해 나갔다. 주탑의 뒷면에는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밝혀

     진 33명의 명단을 도표로 만든 '절두산 성지 순교자 명단'을 새겼다.
     이 명단은 전문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서 각종 교회기록을 참고하여 작성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을 가능
     성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이들의 명단만을 제시했

     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좌

      좌측탑은 길이가 5m, 가로가 2m 30cm, 세로가 1m 60cm으로 되어 있다. 여기

      에는 관찬 기록에 등장하는 무명인 4명을 비롯하여, 힘없는 농부, 상인, 노비

      들의 신앙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 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많은 치명자

      들을 위한 '무명순교탑'이다. 그 감동적 비문에 쓰여진 바대로 박해의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교회의 진정한 주인이었고, 진정으

      로 큰 인물이었다.
      이들을 기억하면서 무명의 우리도 우리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다짐하기 위해서 이 '무명순교탑'을 만들었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우측탑

      우측탑은 절두탑이다. 이 탑의 상부에 있는 절두상(切頭像)은 사실 이 순교현양

      기념비의 중심 테마다. 순교자의 잘린 머리는 탑 위에서 오늘의 우리를 경계하

      고 있다. 이 절두상의 부릅뜬 한 눈은 탑의 중심이다. 이 부릅뜬 눈으로 무거운

      화강석 기념탑은 지탱되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있기를 경

      계한다. 우리는 쉴 겨를 없이 매일 죽음을 체크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의 아들

      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고 그리스도님

      은 말씀하셨다. 부릅뜬 눈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부활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현실을 확실히 경계하면서 미래에의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

      는 기다리는 눈이다.

      못하는 겨레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연민의 눈물이다.

      회개의 연속인 삶만이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은  그침 없는  자기 회개와 정개

      (定改)의 눈물이다. 그 특이한 두 눈은 신망애를 상징하며, 우리에게 그 순교와

      자기 비움의 신비를 기억케 할 것이다.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 

      정에서 배교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치명자인 남편 김진(베드로)를 따라 닷새 후에 순교하신 김큰

      아기 순교자의 상을 비롯하여 열세 분의 상이 새겨져 있다. 우측탑의 윗면에는

      조광 교수가 짓고 김단희 선생이 쓴 '절두산 순교기념비문'이 있다.


 
 

                 조창원 작, 절두산의 대학살2, 73 x 60.5cm, 2008년

 

                                 조창원 작, 절두산에서 대학살



                    조창원 작, 절두산의 대학살, 73 x 91cm, 2008년



                                               성지 정원



                                                 성지 공원

'

                                              오성바위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

      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

      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

      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

      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조창원 작, 오성 바위에서 최후의 만찬, 65 x 53cm, 2008년



                                               형구 돌

      1976년 연풍 성지를 개발할 때 두 개가 발굴되어 하나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 후에 또 하나가 발굴되어

      현재 연풍 성지에 형구돌이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 절두산에 있는 형구돌

      의 크기는 둘레3m, 앞구멍 지름 30Cm, 뒷구멍 지름 6Cm,  구멍의 앞뒤 거리     

      30Cm로 원추형이다.형구돌은 교수형을 집행했던 형구로 가운데 구멍으로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죄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

      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쳐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의 목

      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는데, 이곳 연풍에서는 형구돌을 사용해 천주교 신자

      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 십자가의길>



     2001년 11월 1일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십자가의 길

    에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부분을 새겨넣었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

    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15처



                                            은언군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1801년 3월).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임을 당하였는데,
     송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박순집 성인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
     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
     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
     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
     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

     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부친, 형제, 삼촌,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

     다.




                                            성 남종삼 동상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
     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
     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 순교사적비



                                해운당대사의 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1960년 남종삼 성인

     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됨-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

      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척화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물관 전시실 내부>



                                              성지 박물관



       순교자 박물관 입구 쪽에 있는 안수 성모상이다. 원래 야외에 있던 것을
       박물관 입구 쪽으로 옮겼다.




                                              박물관 입구



                                         박물관 입구 모자익

     제 1전시실

     1구역 .....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외국 선교사들은 16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였지만, 조선에는 아직
     신앙이 전해지지 않았다. 17세기에 들어와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서양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조선에서는 남인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학
     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터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 교회로 출발하였다.


     2구역 .....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천주교가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종교로 발전하자 조선의 정치.사회.
     사상적으로 마찰을 빚으며 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자들은 교회 재건과 사제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
     였고,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 최초로 사제로 서품되면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렀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보이지 않는 씨앗이 되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순교자 박물관 안에 있는 목각 성모상









                                              전시실



                                                전시실



                                               전시실



                                               전시 유물















                                               전시 유물



                                                전시 유물



                                              전시 유물

 

                                                  전시 유물

 

                                                 전시 유물

 

                                                 전시 유물



     한국의 성인.순교자 , 김대건 신부 성광(머리털, 치아 등 신체의 일부)



                                               전시 유물

 

                                                천주실의

      중국 명나라 때인 1593- 96년에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가 편찬한 한문
      으로 된 책으로 중국과 서양학자가 질문 대답하는 대화체 양식으로 기술된
      천주교 교리서이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후에 전 한문 문화권으로 전
      파되어 갔고 한국 초기 교회 창설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천주실의





                                              주교요지 

    [주교요지]의 목판본이 간행되기 이전 박해시대 신자들은 이를 필사하여 읽었다.



                                           주교요지 목판본

      [주교요지]는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이다. 필사본으로 전해져서
       읽혀지던 이책은 병인박해 직전인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목판본 판목들이 남아서 박해를 이긴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다.




                                     강세황의 천주당 시문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당대의 예단(藝壇)의 총수로서 시서화
       (詩書畵)에도 뛰어났으며 감식에도 출중하여 정조의 아낌을 받았다. 
       그는 칠순을 맞이한 청국 건륭황제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 왕조에서
       파견한 천추사(千秋使)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파견되었으며 북경에
       서 천주당을 견문하고 한편의 시를 지었다.

                                    김상기(金庠基) 박사 기증품


 

                                             황사영 백서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 직전에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 배론의 교우촌 토굴에 몸을
     숨기고 조선 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을 비단에 써서 이를 북경교회로
     보내려고 했다. 비단에 쓴 편지이므로 이를 <백서(帛書)>라고 한다.

     황사영 백서는 북경교회로 보내기 전 사전에 압수되었다. 이 문서의 크기는 가로  

     62cm, 세로38cm 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여진 것인데 모두 13,384자에

     달한다.
     원본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중이다.



                                            이승훈의 간찰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그해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수광의 간찰

      이수광(1563-1628)은 3차에 걸쳐 사신으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서양 학술을
      [지봉유설]에 소개하였으나 [天主實義(천주실의)]나 [交友論(교우론)]등
      천주교 서적을 소개하였다.


 

                                           서적 및 유품들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
                                 이승훈, 정약용 이 보인다.




                                                 이승훈



                                                 정약용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명례방

      1785년초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 사랑 대청에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와 이벽, 권일신, 이승훈 등이 모여 주일 집회를 갖고 있다.
      경상 위에는 '천주실의'나 '칠극' 같은 천주교 교리서가 펼쳐져 있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수난상도 눈에 띈다.




                                           성 유진길, 유대철

 

                                      성 정정혜, 유소사, 정하상



                                               성 현석문



                                          김대건 신부 흉상



                                              성 김대건



                                                  윤유일



                                               주문모

     <제 2전시실>

     4구역 ..... 한국 천주교회의 근.현대사 (1866~1984년)

     조선은 19세기에 잇따른 문호개방의 격동기 속에서

     1886년 한불조약으로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

     1905년에는 비로소 일반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 공인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 침략과 남북 분단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다.


    5구역 ..... 역대 서울대교구장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후 임명된 역대 서울대교구장을 
    통해 살펴보는 한국 천주교회사


    6구역 .....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인형 장인, 임수현이 한국 천주교회사 12대 사건을 80여종의
    인형으로 형상화하였다.


    7구역 ..... 200주년 기념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103위 성인은 김대건 신부와 평신도 92명,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8구역 ..... 박해시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이전에는 사제와 신자가 벽면의 제대를
    향하여 미사를 드렸기 때문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등을 보이고 미사를
    집전했으며, 라틴어로 된 경문을 읽었다.




              충남 해미 순교지호야나무로 만든 구유, 제2 전시실 입구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문시 사용하던 성구들,

                     200주년 기념대회와 103위 성인 시성식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



                                                전시 유물

 

                                                전시 유물



                                                 전시 유물



                                        김수환 추기경 전시관



                                           김수환 추기경 전시관

 

                                           김수환 추기경 전시관



                                          김수환 추기경 전시관

 

                                        김수환 추기경 전시관



                                           외부 박해 전시물



                                                 교육관



                                                   약도
 

 받은 사진 -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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