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뜨거운 바람이 이라크 남부의 사막을 가로질러 휘몰아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바로 이곳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동했다. 1899년 바그다드의 남서쪽 사막에서 전(全)세계를 놀라게 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성경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바빌론의 이스타르문이 그 모습을 땅 위로 드러냈다. 높이 14m에 코발트 색 성문이 사막 한 가운데 느닷없이 우뚝 솟아 버린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신으로 숭배했던 동물들의 형상이 성문 벽을 따라 묘사 돼 있다. 사자는 이스타르 여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이 유적문의 발견으로 전(全)세계는 메소포타미아가 한 때 어떤 번영을 누렸는가를 알 수 있게 됐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뛰어난 건축물과 미술 작품만을 남긴 것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각 가지 지적, 사회적 체계를 탄생시킨 문명이다.
문자가 처음으로 발명돼 쓰인 곳도 바로 메소포타미아였다. 돌 표면에 새겨져 있는 이 쐐기 형 무늬가 설형문자다. 이것이 바로 ‘눈에는 눈’이란 문구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약 3800년 전에 쓰여졌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바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후, 내세에서의 환생에 대해 믿었던 고대의 이집트인들과는 달리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현재의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가치를 두었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영했던 곳은 오늘날의 이라크 공화국이 위치해 있는 지역이다. 걸프 전 이후 이라크로 들어가는 모든 항공편이 두절됐기 때문에 차로 인접국가인 요르단을 통과해 12시간을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티그리스 강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관통해 흐르고 있다. 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뤄낸 두 젖줄이다. 메소포타미아란 단어의 의미 자체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이다.
1990년 걸프 전 이후, 이라크는 UN의 경제체제하에 있다. 때문에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몹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기조차 3시간씩 공급이 중단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라크의 통화인 디나르인 화폐가치는 걸프 전 이전에 비해 만 오천대 일로 평가절하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말로 수크라 불리는 시장 통은 여전히 분주하다.
북부 이라크에서 산출된 석류열매 그리고 치즈와 요구르트는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고대로부터 매일 섭취해 온 음식이다. 시장 간 모퉁이에 식수가 담긴 투박한 도자기 항아리가 있다. 항아리를 스며 나온 물방울이 증발하면서 열기를 함께 날려 버리기 때문에 항아리 속에 물은 냉장고 속에 넣어 둔 듯 시원해진다. 이 두 가지는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옛 선조로부터 수세기를 거치며 물려받은 지혜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300km 지점에 메소포타미아 최초에 문명이 꽃피웠던 수메르 인의 고대 도시 우르의 유적지가 있다.
우르 지역은 걸프 전 당시 매우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걸프 전 이후, 외국 방송사가 방송용 카메라를 사용해 이 지역을 촬영하도록 이라크 당국으로부터 허용받기는 처음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느닷없이 우뚝 치솟아 있는 저것이 바로 지구라트다. 지구라트란 수메르 인들이 천국으로부터 온 신들을 마지하고 그 신들로부터의 메시지를 경청했던 신전이다. 지난 수년 간 벽돌이 많이 무너져 내려 버렸으나 다시 41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에 복구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걸프 전은 상흔을 남겼다.
“여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미국인 짓이죠. 1991년이에요. 여기 이걸 보시죠. 로켓탄이죠. 그 파편입니다. 비행기에서 쐈어요. 전투에서 말이죠. 서쪽으로 날아와서 여기에 다가 마구 쏴 버린 겁니다. 여기 저기 뚫려 있는 구멍을 한 번 보세요.”
지구라트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지금은 반쯤 모래에 파묻혔지만 그 기단부가 무려 수백 미터를 넘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는 왕궁과 시민들의 주거 지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폐허지만 한 때는 4천 2백 가구, 총 3만 4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도시 국가였다.
유적지 중앙에서 발견된 왕묘의 내부에서 눈부신 유물들이 출토됐다. 우르 왕묘의 보물이라 불리는 출토품들을 보자. 이 장신구는 황금과 여러 가지 색깔의 보석들로 만들어졌다. 이 장신구의 호화스러움 만으로도 우르가 한 때 얼마나 찬란한 번영을 누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르는 사막 위에 황량하게 무너져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황폐한 지역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대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르의 유적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0km 쯤 가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인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을 만난다. 풍부한 강수량과 기름진 땅을 가진 이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란 이름으로 불린다. 바로 여기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에 선사 유적지가 발견됐다. 수메르보다 3500년이나 오래된 케이오누 거주지다. 사람들은 이곳에 정착해서 사냥과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여기저기서 눈에 띠는 키 30cm 가량의 이 풀은 야생밀의 일종이다. 케이오누 인들은 들판에 자라나는 이 야생밀과 야생 콩을 따 모아 주식으로 삼았다. 그러다 마침내 밀을 경작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농경의 시초였다. 케이오누에서 출토된 유적품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이 작물을 경작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염소의 뿔로 만들어진 원형 낫이다. 흑요암과 같이 날카로운 돌은 그 가장 자리에 홈을 내 밀을 베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썼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밀을 경작하기 시작했을까?
케이오누의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아즐리 오즈도간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들은 야생 밀을 주워 모아 먹었죠. 그러다 한번은 너무 많이 모은 거예요. 그래서 먹고 남은 야생 밀을 집 밖에 버렸습니다. 다음에 그 자리에서 싹이 나고 많은 양의 밀을 얻게 된 거죠. 이렇게 해서 아주 우연히 경작의 개념을 깨우치게 된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직 토기를 만들 줄 몰랐기 때문에 밀로 요리를 해 먹을 수는 없었죠. 아마 맷돌을 이용해서 밀가루를 만들어 먹었으리라 보입니다.”
이것이 케이오누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맷돌이다. 그들은 밀을 간 후, 물을 섞어 반죽으로 만들어 뜨거운 돌판 위에 놓아 구워 먹었다. 일종의 팬케익 같은 음식이었다. 오늘날 그 야생 밀은 현재 케이오누 유적지역에 살고 있는 쿠르드 족이 방목하는 양들에게 뜯어 먹이고 있다.
쿠르드 족의 주식은 밀가루로 만든 ‘사치이 에크멕’라는 음식이다. 달궈진 철판 위에 독특한 방식으로 구워진 일종의 밀전병이다. 이곳이 바로 인류가 야생밀과 야생 보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곳이다. 이 만남이 결국은 일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을 싹 틔운 계기가 됐다.
약 7천 년 전부터 이곳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밀을 경작하며 살아온 케이오누 인들 중에 일부가 어느 날 자신들의 주식인 밀과 보리를 가지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 떠났다. 이주의 원인은 기후의 변화와 인구의 급증으로 인한 식량부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막에서 일부가 붕괴된 또 다른 지구라트가 발견됐다. 이곳 역시 수메르에 도시였던 우르크의 잔해다.
이 물병은 연대가 5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우르크 한 신전의 유적지에서 출토됐다. 물병의 밑 부분엔 밀의 그림이 조각돼 있다. 그 시대에 이미 밀이 경작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여러 수메르 도시의 잔해는 하나 같이 사막 한 가운데서 발견됐다. 그들은 왜 사막에다 도시를 지은 것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니푸르에서 잡혔다. 진흙으로 만든 테이블 위에 니푸르의 지도가 있었다. 오른 쪽에 보이는 것이 지구라트다. 왼쪽에는 도시를 감싼 성벽이 보인다. 성벽 바깥쪽으로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다. 즉 그 시절엔 유프라테스 강이 도시 가까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강물을 끌어 들어오기 위한 운하가 도시를 관통해 파여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니푸르의 주변 경관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 날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위치다. 수메르의 고대들은 모두 강에서 상당히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수메르 시대에 두 강이 이와 같이 흐르고 있었음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그러니까 수메르의 모든 도시들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세워졌던 것이다.
이곳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합류하는 지점인 알 쿠르나다. 오른쪽이 티그리스 강이고 왼쪽이 유프라테스 강이다. 이 지역은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갈대만 무성하게 자라있는 소택지대다. 이라크 남부의 평야는 높낮이의 변화가 없이 거의 비슷한 고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두 강은 더 이상 흐르지를 못하고 여기 이곳에 와서 합쳐진 채, 땅 위로 물이 넘쳐 이렇게 방대한 소택 지대를 형성한다.
물줄기를 끌어 오기 위한 운하가 사방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키우고 대추야자와 밀을 경작하며 살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갈대를 이용해 만든 이곳 소택지대에 집들은 상당히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수메르 시대의 구조물이다. 아주 흡사한 모양의 갈대 집과 양 떼들의 풍경이 묘사돼 있다.
그런데 소택지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바짝 메마른 거친 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흘러 내려온 비옥한 토양이 안타깝게도 작렬하는 태양열에 의해 이렇게 메말라 버린다. 이렇게 건조해진 당에서 밀을 경작하려면 필수적으로 많은 양의 물을 끌어와야만 했다. 기원전 7세기경의 부조에 보면 강 줄기로부터 물을 퍼 올리는 사람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삼각형 모양의 도구로 물을 퍼 올린 후 다시 지렛대를 이용해 농경지로 옮기고 있다. 최초로 관계 경작을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농업의 혁명을 가져온 이들이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 인들이다. 자연환경에 그저 복종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하므로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자신들의 메마른 땅을 이토록 비옥하게 만들었다.
겨울 동안에 물을 밭으로 끌어들이고 씨앗을 뿌려 둠으로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초여름이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강 상류에서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밀을 가지고 강을 따라 이동해 내려왔다. 그러다 이곳 메소포타미아에서 기름지고 비옥한 땅을 만난 것이다. 그들에 의해 관계 농업이 처음 시작됐고 그로 인해 그들은 넘칠 정도로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하게 됐다.
높이가 무려 6미터나 되는 이 커다란 갈대 집은 무드히프(Mudhif)라 부르는 마을 회의장이다. 수문의 개폐시기를 결정하는 일이나 수로 공사여부를 결정하는 일 따위의 마을 중대사가 있을 때에는 마을 남녀들 모두가 이 무드히프에 모여 함께 의논을 하곤 했다.
“아주 옛날부터 이곳의 토지는 항상 비옥했습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덕분이지요. 지난 몇 년 간 강 상류 지역에 비가 전혀 내리지 않자 강 수위가 눈에 띠게 낮아 졌어요. 그래도 여기는 여전히 농사지을 물이 충분했습니다.”
처음에는 농경지 주변에만 관계가 이루어졌으나 그 범위와 스케일이 점차적으로 확장됐다. 오늘날의 텔로시에 해당하는 고대도시 기루스에서는 운하의 수문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됐다. 수문은 물이 스며들지 않게 구워진 벽돌로 지어졌다. 여기로부터 유프라테스 강물이 도시 안으로 유입됐다. 수메르 인들은 거미줄 같이 운하를 건설하므로 메마른 불모지를 비옥한 농경지로 바꿨다. 방대한 수량의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굽이쳐 나온 물이 이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워 낸 것이다.
농작물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수확량을 기록하기 위한 기호가 만들어졌다. 알곡의 모양을 닮은 이 기호는 보리를 뜻한다. 사람의 입과 빵을 닮은 부호는 먹는다는 뜻이다. 이 기호들이 발전해 마침내 설형문자가 만들어졌다. 런던에 있는 대형박물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토된 점토판의 숫자가 현재까지만 해도 무려 5만 여개에 이른다. 그중의 1/4이 대형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점토판의 새겨진 설형문자들이 판독되면서 우리는 점차 메소포타미아 시대에 사회제도는 물론 일반 백성들의 사소한 일상생활까지 짐작케 볼 수 있게 됐다.
교토 대학의 가즈야 마에가와 교수는 지난 30년간 오로지 점토판 판독에 바쳐온 학자다. 대부분의 점토판이 일부가 떨어져 나갔거나 너무 많이 달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판독한다는 것은 극도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마에가와 교수는 수메르 인들이 매년 놀랍도록 많은 양에 밀을 수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점토판으로부터 판독해 냈다. 이것은 기원전 2370년 경 기루스에서 제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이다.
“밭고랑에 뿌려진 씨앗과 추수된 곡식의 양을 비교해서 계산을 해보니까 고대 수메르 인들은 무려 76배에 이르는 아주 많은 수확량을 거두었습니다. 다른 문명과 한 번 비교해 보자면 9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뿌려진 씨앗에 비해서 거둬진 수확량이 불과 2배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의 수확률은 아주 놀라운 수치인 것입니다.”
자그마치 76배라는 높은 수확률은 고대 수메르 인들의 놀라운 지혜에 이해 낳아진 결과였다. 이 점토판에는 수메르 인들이 씨앗을 뿌리는데 사용됐던 농기구가 묘사돼 있다. 쟁기 끝에 깔때기 모양의 기구를 부착시켜 씨앗을 뿌리므로 일정양의 씨앗이 밭고랑을 따라 고르게 뿌려졌던 것이다. 이런 농기구와 농법을 이용하므로 수확량을 증가시켰고 또한 잉여 농산물의 저장법을 고안해내 수메르 인들은 사시사철 풍부한 식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르크에서 출토된 물병이다. 물병에 새겨진 그림으로부터 이 시대에는 밀에 수확량에 따라 사회 계층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었다. 물병의 하단에는 수확된 밀과 양 떼가 조각돼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수확물을 나르고 있는 수메르 인들이 있다. 그리고 상단에는 우측에 보이는 여신에게 양을 대신해서 곡물을 바치고 있는 제사장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밀의 수확량이 부의 판단 기준이었던 수메르 사회는 점차 도시 문명의 양상으로 발달돼 간다.
수메르의 도시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레오나드 울리경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재현해 낸 우르의 모습을 같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4100년에서 4500년 전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 국가 우르의 거리 풍경이다. 주택들은 진흙을 햇볕에 말려 만든 벽돌로 지어졌다. 길가를 향해 창문을 낸 집은 찾아볼 수 없다. 집집마다 햇볕을 받을 수 있는 앞마당이 있다. 높이 8m의 성벽이 우르의 지역을 빙 돌며 건축돼 있다. 성벽 바깥쪽으로 끝없는 밀밭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유프라테스 강이 도시 바로 옆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도시는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690m, 남쪽과 북쪽으로 1030m를 뻗어나가 방대하게 펼쳐져 있다. 농부들의 집은 갈대로 만들어졌다. 약 20만 명의 농부들이 우르의 근교에 모여살고 있었다. 이것이 우르의 항구다. 이곳은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페르시아 만으로 연결된다. 도시의 중앙에는 다시 성벽을 쌓아 고립시킨 성역, 지구라트가 있다. 지구라트는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높이가 30m에 달한다. 지구라트의 맨 꼭대기에는 달의 신 난나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다. 이 신전에서 우르의 왕과 제사장은 곡식과 보석을 신에게 바치며 번영과 풍작을 기원 드렸다. 도시 중앙에 신을 모시는 신전을 건설하므로 도시 국가인 우르에는 전역에서 생산된 물품을 가져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나날이 번창했다.
여기는 우르의 서민들이 모여 살았던 주거지역이다. 주택의 크기는 평균 35~70평방미터에 이르렀으며 점토판의 남은 기록을 판독해 보니 집을 사고팔기도 한 모양이었다. 우르의 시민들은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시의 북서 방면에서 조금 더 넓은 규모의 집들이 발견됐다. 아마도 필경사와 같은 부유층들이 살았던 곳으로 짐작 된다. 이 집은 한 필경사의 집이었다. 당시 필경사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서를 제약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던 인물들로 수메르 사회의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어 냈으니 인간은 노동을 해야만 한다. 왕이라 해도 죽고 나면 흙으로 돌아간다.
- 길가메쉬 서사시 중에서 |
수메르 인들은 믿었다. 그들은 내생에서의 영혼 불멸한 삶 따위는 믿지 않았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을 창조한 수메르 인이 만들어 낸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길가메쉬다. 사자를 안고 있는 이 영웅의 상이 바로 길가메쉬의 조각상이다. 한 점토 판에서 길가메쉬에 대한 서사시가 나왔다. 이것이 아마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서사시가 아닐까 싶다. 영웅 길가메쉬의 삶에서 우리는 수메르 인들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다. 길가메쉬는 도시 국가 우르크의 왕이었다. 그는 온갖 명성과 존경을 누리고 있는 위대한 왕이었다. 그런 길가메쉬가 불멸의 생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때 여신이 나타나 그에게 이렇게 이른다.
"길가메쉬야! 너의 배를 맛있는 음식으로 채우고 밤과 낮, 낮과 밤을 새워 춤추고 기뻐하라. 잔치를 하며 즐거워하라.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몸을 정결히 씻으며 너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식을 귀히 여기며 아내를 따스하게 품에 안아 행복하게 해줘라 이것만으로도 인간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니라."
그 말을 들은 길가메쉬는 더 이상 찾아야 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우르크로 되돌아온다. 그는 왕으로의 의무를 다하며 그의 여생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수메르 인들은 생명의 유한성을 긍정하고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에 치중해 그 최대한을 누리고자 했다는 것을 이 얘기로부터 알 수 있다.
밀과 보리는 수메르 인들을 점점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우르에서 출토된 슈부아두 여왕의 공후다. 풍작을 상징하는 사냥의 뿔 모양으로 디자인 돼 있다. 이 악기는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숲속의 사냥이란 이 작품은 생명을 상징한다. 고고학자들을 의문으로 몰아 간 것은 사냥의 뿔과 눈 주위에 박혀 있는 푸른 색의 돌이었다. 바로 청금석이 아닌가?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청금석이 전혀 나질 않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여기는 파키스탄 북부의 무역 도시인 페샤와르다. 오늘도 내전이 끊이질 않는 이곳에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청금석이 수입된다. 수메르 시대에도 청금석의 채광은 북부 파키스탄 고원에 있는 바다크샨(Badakshan)에 한정돼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가공이 전혀 되지 않은 청금석 원석으로 우르의 공예품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다. 청금석의 품질은 물을 뿌려서 적셔보면 확연히 눈으로 구분이 가게 드러난다. 선명히 파란 색이 나는 것을 최고 품질로 여긴다.
청금석의 교역은 수메르 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기원전 3500년경과 같은 시기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청금석은 무려 3000km나 떨어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동돼 밀이나 보리 혹은 섬유와 맞바꿔졌다. 실크로드가 생기기 3000년 전에 이미 청금석 로드라는 무역로가 아시아 대륙을 관통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돌로 만들어진 원통형 도장이다. 고역이 점점 더 활발해짐에 따라 계약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토판에 이 원통형 도장을 굴려 계약서의 서명이나 교역 물품에 봉인으로 이용했다.
매사에 계약을 중시했던 수메르 인들은 결국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가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라고 명했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수메르 시대에 모든 법을 총 편찬한 법전이었다. 법전에 총 282조항 중 대부분이 상거래나 결혼, 상속과 같은 일상생활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률이다. 함무라비법전 비는 20세기 초에 고대 이란의 도시였던 수사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기원전 12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침략했던 엘라민들이 전리품으로 함무라비법전 비를 그리 가져간 것이었다.
법전비 최상층부 좌측에는 함무라비 왕이 그리고 우측에는 태양신 샤마슈가 조각돼 있다. 지배를 상징하는 고리와 권위를 상징하는 막대기가 왕에게 주어지고 있다. 유명한 금언이 되어 버린 ‘눈에는 눈’이라는 문구는 법전비 뒷면에 새겨져 196조항 중에 있는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다른 이의 눈을 뽑는다면 그의 눈도 뽑아내도록 하라"
그러나 여성과 아동 그리고 다른 소외계층을 위해서는 복지정책까지 제정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사회구조는 철저히 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이룩됐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물은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내린 비와 눈이 녹은 물로 형성된다. 그런데 아나톨리아 고원에 강수량은 해마다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 두 강이 큰 강이기는 하지만 나일 강에 비해 보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길이다. 강 상류 지역에 폭우나 폭설이 내리면 곧바로 강 하류 지역이 범람하게 된다.
이것은 우르에 있는 지구라트다. 지구라트의 하단 부분에 검정색 물질이 발라져 있다. 이것이 바로 수메르 인들이 어떻게 유프라테스 강에 대항했나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우르에서 600km를 올라가면 히트라는 도시가 있다. 수메르 인들은 이곳 히트에서 그 검정색 물질을 수급했다. 유황가스와 더불어 땅으로 분출되고 있는 이 물질은 역청이라고 불리는 자연 아스팔트다. 역청은 물에 뜨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아마 수메르 인들은 이곳 히트로 와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에 역청을 직접 부어 넣는 방법을 써서 우르로 운반한 것 같다.
먼저 모래를 손에 충분히 묻힌 후에 날쌘 동작으로 역청을 뭉친다. 역청은 접착력이 강하다. 오늘날에도 이라크 인들의 일상생활 여기저기에 이 역청이 많이 쓰인다. 역청은 방수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배 밑창이나 지붕에 발라 물이 새는 것을 막는데 이용된다. 지구라트 하단에 발라진 역청은 범람에 의해 벽돌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대 범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엿샛날 엿새 밤을 온 천지에 사나운 폭풍과 억수 같은 비와 홍수가 몰아쳤다. 폭풍과 폭우가 한바탕 전쟁을 하는 것 같았다. 7일째 새벽이 동터오자 남쪽으로부터 몰아쳐왔다는 폭풍은 가라앉으며 잠잠해졌으나 강물은 여전히 무섭게 범람했다."
대 범람은 우르를 완전히 삼켰으며 오직 지구라트만이 잠기지 않고 남아있었다. 지구라트는 범람기에 시민과 동물들이 피신해 있는 대비처의 역할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강의 범람을 매년 일정 기에 일어나는 신의 축복어린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범람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신의 저주가 내린 벌이라고 생각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화인 길가메쉬의 서사시에도 수메르인의 자연관이 표현된 부분이 있다.
"길가메쉬왕이 달콤한 향기가 나는 개잎갈나무 숲으로 탐험을 떠났다. 수메르에는 숲이 없었기 때문에 수메르 인들에게 나무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숲에는 공포의 신 훔바바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훔바바가 무서워 감히 숲속의 나무들을 베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길가메쉬는 혼자 숲으로 들어가 훔바바를 대면했다. 그리곤 양손으로 움켜진 도끼를 힘껏 쳐들어 훔바바의 목을 찍어 내렸다."
마침내 숲은 훔바바의 장악에서 풀려나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주게 됐다. 이것은 기원전 8세기에 제작된 부조다. 이들이 바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현재에 레바논 지방의 지중해 연안으로 1000km가 넘는 긴 여행을 한 수메르 인들이다. 그들은 숲에서 베어낸 개잎갈나무를 배에 실어 고향으로 가져왔다. 수메르 인들은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자연과 분연히 맞서 싸운 사람들임을 ‘길가메쉬 서사시’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것은 수메르 미술품 최고 걸작 중에 하나인 우르의 ‘스탠더드’라는 작품이다. 4600년 전 도시국가 우르는 그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그 시절 우르 인들의 생활상이 명확히 보여 지고 있다. 우르에는 상인이나 도공 같은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커다란 망토를 입은 군인들이다. 당시에 최첨단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전차를 노쇠들이 끌고 있다. 바퀴 또한 수메르 인에 의해 발명됐다. 이들은 아마 왕족의 일가이거나 제사장 혹은 필경사 같은 상류층 사람들로 보인다.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는 그들 곁에서 악사가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우르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고 있던 시절, 우르 시민들의 하루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 봤다. 지붕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다. 여름엔 모두들 복사열을 피하기 위해 지붕에서 잠을 잤다. 이라크 시골 지방을 가보면 지금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양털로 만들어진 퍼낙스란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도시에선 바로 이렇게 생긴 옷이 최첨단의 유행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말들이 점토판에 새겨져 있었다. 수메르인들의 현실적인 인생관이 확연히 드러나는 말들이다.
‘인생의 기쁨, 그 이름은 맥주.’
‘인생의 슬픔, 그 이름은 원정.’
사람들은 맥주를 단지에 담아 빨대로 빨아 마셨다. 맥주 또한 수메르 인들이 처음 만들었다. 수메르 인들의 유행어들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간혹은 너무 신랄하기도 했다.
‘칠칠지 못한 마누라는 악마보다도 더 두렵다.’
‘결혼은 기쁜 것, 그러나 이혼은 더욱 더 기쁜 것.’
우르에는 온갖 호화품이 넘쳐 났으며 그들은 매우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리고 이 매력적인 도시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었다. 시장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온 나무와 포도주로 채워진 항아리들이 교환됐다. 인근지방에서 생산된 싱싱한 생선과 대추야자 열매도 이곳으로 모두 모였다. 수메르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러니 쓰자. 하지만 금방 죽지는 않는다. 그러니 저축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수메르의 영화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수메르는 마침내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가 점토판에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수메르 문명의 번영과 영화를 밑받침해주고 있던 농경지대의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기원전 2350년 전으로부터 150년가량의 경과하면서 밀의 수확량은 자그마치 40%나 감소세를 보였다. 급기야 밀은 거의 수확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보리만은 계속 수확이 됐다. 수확량이 급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왜 유독 밀만이 자라질 못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바로 소금기 때문이었다. 밀은 유난히 소금기에 민감한 작물이다. 얄굿게도 소금기로 인한 이 피해는 다름 아닌 강물을 끌어 관계 경작을 한 결과로 생긴 것이었다. 농작물에 물을 주기 위해 뿌려진 강물은 뜨거운 햇볕에 의해 급속도로 증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흙 속의 염분이 지표면으로 표출되게 된 것이다.
“이곳을 비옥한 땅으로 되돌리려면 염분을 씻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번 거듭해서 씻어낸다면 아마 소금기가 없어져서 예전의 기름진 토양으로 돌아가겠지요.”
정성을 쏟는 다면 염분의 피해는 방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 수메르 인들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도시의 생활을 즐기느라 정성을 기울여 가꾸고 보살폈어야 할 농경지에 무심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수메르 번영의 기초가 됐던 밀 생산이 비틀거리게 되자, 수메르는 이민족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기원전 2004년에 이르러 수메르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 레바논이다. 레바논에서 시리아와 터키에 걸쳐 있는 이 광활한 산맥은 한 때 개잎깔나무 숲으로 빽빽이 덮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잎깔나무 숲은 불모의 산등성이를 따라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그 찬란한 번영을 이루기 위해 자연에 대항한 때문이었다. 훗날 지중해 연안을 따라 번창했던 그리스, 로마를 위시한 다른 문명들 또한 그 울창했던 숲을 파손시켰다. 이 거대한 개잎깔나무는 무려 4000년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 고목은 자연에 의해 지배를 받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며 문명을 이룩하고 또 쓰러져 간 그 모든 영광과 비운의 현장을 묵묵히 바라본 역사의 목격자다.
현세에서의 삶을 중히 여긴 수메르 인들은 지혜와 기술을 이용해 살아있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풍부하게 가꿨다. 수메르 인들은 이 거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오직 진흙과 강물로 인류에 가장 오래된 문명을 이룩해 낸 위대한 사람들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한 알의 밀로 시작됐다. 메소포타미아의 지혜와 정신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의 생활 곳곳에 깊숙이 배어 있는 과거로부터의 소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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