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잠언 공부

14-8. 의인과 악인의 결말(14,31-35)

윤 베드로 2023. 8. 3. 08:01

31 약한 이를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불쌍한 이를 동정함은 그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32 악인은 제 악함 때문에 망하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피신처를 얻는다.

33 지혜는 슬기로운 마음에 깃들지만

                 우둔한 자의 마음속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34 정의는 나라를 드높이지만 죄악은 민족의 치욕이 된다.

35 임금의 총애는 사려 깊은 종에게 내리고 그의 진노는 수치스러운 자에게 내린다.

 

하느님을 떠나 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심한 재난을 만나면

                    금방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의로운 사람은 무서운 환난과 죽음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피난처를 향해 피신할 수 있게 된다.

정의는 나라의 운명과 명예를 좌우하는 귀중한 가치이다.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지고,

                정의가 바로 서면 나라도 바로 서기 때문이다.

 

31: 하느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가난하거나 궁핍한 것이 한 인간으로서 멸시를 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느님은 각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부를 허락해 주시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난을 허락해 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32: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죽음은 인간에게 절대 절망이다.

그러나 의인은 죽음 후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절망이 될 수 없다.

 

33: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드러내야 할 때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34: 정의와 죄악은 개인의 삶에 영광과 수치를 가져다주는 것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35: 슬기로운 자는 은총을 입지만 어리석은 자는 진노를 당하는 것이다.

 

 

잠언이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하느냐(to do)”라는 문제보다는

                 “무엇이 되느냐(to be)”에 있다.

잠언이 이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정직한 자가 되었을 때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은

        정직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선한 자가 되었을 때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은 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잠언에서 사람을 칭()할 때 사용되는 명사들, 즉 지혜로운 자, 미련한 자,

                 의인, 악인, 슬기로운 자, 어리석은 자, 정직한 자 등은

                  모두 사람의 어떠함(to be)을 표현해 주고 있는 언어들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지 안다면

             그를 통하여 어떤 일들이 행해 질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

지혜로운 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통하여

                 어리석은 일들이 행해 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는 자를 통하여

                  지혜로운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또한 부지런한 자에게 궁핍한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게으른 자에게 풍요로움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합당치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합당한 일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요청된다.

하나는 우리의 관심이 외모를 꾸미는 것으로부터

             속사람을 꾸미는 일로 바꾸어져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관심이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로부터

            “무엇이 되느냐라는 문제로 바꾸어져야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외모를 꾸미기 위하여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을

         우리의 속사람(내적 존재)을 꾸미는 일에 투자한다면,

         우리와 우리가 속한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처럼 우리의 관심이 바꾸어진다면

             우리와 공동체 모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변화 중에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