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시편 공부

제90편 헛되고 헛된 인생

윤 베드로 2022. 8. 18. 07:42

90: 시편의 제4권은 하느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

이 시는 옛날 광야를 건널 때 겪었던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우러나온 시이다.

교훈적 요소도 들어 있는 공동 탄원시편,

인생의 덧없음과 비참한 모습에 대한 묵상.

작가는 인간의 덧없음과 Ɵ의 영원성을 대조시키고,

            인간의 날들이 Ɵ의 진노에 의해 사라져 감을 고백하면서,

             Ɵ이 그의 백성의 수고를 성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갚아주시기를 기도한다.

 

1. 인생의 덧없음

1 [기도. 하느님의 사람 모세]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

2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3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4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5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6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2. 죄에 대한 벌

7 정녕 저희는 당신의 진노로 스러져 가고 당신의 분노로 소스라칩니다.

8 당신께서는 저희의 잘못을 당신 앞에, 저희의 감추어진 죄를 당신 얼굴의 빛 앞에 드러내십니다.

9 정녕 저희의 모든 날이 당신의 노여움으로 없어져 가니 저희의 세월을 한숨처럼 보냅니다.

10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

11 누가 당신 진노의 위력을, 누가 당신 노여움의 위세를 알겠습니까?

12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3. 하느님께 간청

13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14 아침에 당신의 자애로 저희를 배불리소서. 저희의 모든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15 저희를 내리누르신 그 날수만큼, 저희가 불행을 겪었던 그 햇수만큼 저희를 기쁘게 하소서.

16 당신께서 하신 일이 당신 종들에게, 당신의 영광이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나게 하소서.

17 주 저희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저희에게 잘되게 하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

 

90:

시인은 이 시편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하심과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90,1).”

여기 안식처란 정착할 수 있는 집을 말한다.

모세는 오랜 광야 생활을 통하여 거처가 일정하지 않은 나그네 생활이

            얼마나 고단하고 불안정한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광야 생활이야말로 마치 인생의 여정과 같음을 깨닫고,

             주님만이 영원한 안식처임을 고백하였다.

2절에서 모세는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 은 환경이 변해도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서

         성경에서는 변함없는 것을 상징하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안식처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안정을 얻는 것이다.

 

시인은 영원하신 하느님에 비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말하고 있다.

첫째 시인은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에 비하여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티끌은 크기로 보나 용도로 보나 그 자체로는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인간을 티끌로 묘사한 것은 인간 그 자체는

                참으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시인은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에 비하여

            “밤의 한 순간과 같고, “잠깐 자는 것같으며,

             또한 아침에 돋아나서 저녁에는 사라져가는 풀과 같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년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영원하심에 비하면

                다만 지나간 어제같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삶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에 비하여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90,10).”

 

시인은 이처럼 하느님의 영원하심에 비추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살핀 후,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구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90,12).”

여기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해 달라는 의미이다.

시인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즉 지혜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앎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한 피조물로서 지니고 있는 가치가 티끌과 같고,

        “밤의 한 순간과 같고, “수고와 슬픔뿐이라면 우리는 이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인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14-17절과 같은 기도로 대신하고 있다.

시인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참여하셔서 우리를 이끄실 때,

             비로소 덧없는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아침에 당신의 자애로 저희를 배불리소서.라고 기도하고,

            주님의 행사를 나타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참여하셔서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되고 또한 견고케 된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이 바로 주님을 안식처로 삼고 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