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꽤나 불편합니다. 나보다 못한 이들,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꽤나 불편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잘한다고 생각해서 한 모든 일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편하고,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용인되는 듯하여 불편하고,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이 얄밉기까지 합니다.
불편한 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그냥 두기로 합시다. 그런데 왜 불편한가를 되묻는 것은 어떨까요?
무슨 기준으로, 어떤 상식으로 우리의 불편함을 파헤쳐 볼 수 있을까요?
대개 불편함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둘째 아들을 찬찬히 묵상해 봅니다. 그는 포도밭 일을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들 된 이가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기도 힘들었겠지요.
일은 하기 싫으나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둘째 아들은 포도밭에 가겠노라 답하였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네 삶의 모습이니까요.
하기 싫은 일이 더 많고,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웬만하면 쉽고 하고 싶은 일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세,
이런 자세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얄밉지 않으신가요?
맏아들은 솔직하게 ‘싫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스스로 생각을 바꾸어 일을 하였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솔직하였습니다. 시대의 죄인으로서 솔직한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이었지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긴가민가 뭉그적거리는 자세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솔직히 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이 약합니다. 너무 약하여 포도밭까지 걸어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빌고 빌 뿐입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사,
저를 위하여 빌어 주십사 신앙 공동체에 함께하시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뿐입니다.
세리와 죄인 취급받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 뿐입니다. 이 못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가고픈 마음이 있으니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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