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자료/오늘복음 묵상

8/19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윤 베드로 2020. 8. 18. 12:16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부분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의 고용과 이에 해당하는 품삯에 대한 주인의 지시가,

              둘째 부분은 온종일 일한 일꾼들의 품삯의 지급에 대한 불평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응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의 주된 이유는 주인이 일이 끝날 무렵에 온 일꾼들과 온종일 일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주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일꾼이 자신의 품삯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뭐라 할 상황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비유 속 주인은 원래의 계약대로 품삯을 계산하였기에 결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 정의를 깨뜨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어난 먼저 온 일꾼의 질투입니다.

주인의 정의, 곧 하늘 나라의 정의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비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구직을 걱정하며 장터에서 온종일 서 있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첫째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꼴찌가 되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