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시편 공부

제14편 하느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1절).

윤 베드로 2020. 5. 2. 11:18

14편 하느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1).

 

14: 예언적 훈계,

이 시편은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시편작가는 Ɵ이 없다면서 무섭게 타락해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탄에 잠기면서 그들의 벌을 예언하고(4-6),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다(7).

이 시편은 53편에서 거의 같은 형태로 되풀이하고 있다.

                  53편에서는 주님대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만 다르다.

 

1. 악인의 타락

1 [지휘자에게. 다윗]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악행을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2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그 누가 깨달음 있어 하느님을 찾는지 보시려고.

3 모두 빗나가 온통 썩어 버려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2. 악인들에 대한 징벌

4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나쁜 짓 하는 모든 자들

내 백성을 빵 먹듯 집어삼키는 저들

주님을 부르지 않는 저들.

5 거기에서 그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니

하느님께서 의인의 무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6 가련한 이의 뜻을 너희가 수치스럽게 만들지만

주님께서 그의 피신처이시다.

 

3. 왕국에 대한 갈망

7 ,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베풀어졌으면!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실 때 야곱이 기뻐하고

이스라엘이 즐거워하리라.

 

 

14: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는 그가 창조하신 세계 그 자체다.

바울은 로마의 신도들에게 하느님께서 만물을 통하여 자신을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로마1,20).

또한 하느님은 우리의 양심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다.

그리고 영적 활동의 기관은 양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은 끊임없이 창조자에게로 향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심의 활동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감정으로 드러난다.

신앙에 대한 갈증,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또는 죄책감 등은

           모두 영적 기관으로서 양심의 활동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어떤 사람도 이와 같은 종교적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고 계시다는 증거다.

그리고 하느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요한14:21).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어째서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어리석은가?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악행을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14,1)”

하느님을 부인하는 자는 부패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자연적 상태에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온전함으로 발전해 가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부패해간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인함으로 그의 간섭하심으로부터 떠난다면

우리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산다면 우리는 온전함에 이를 것이다.

또한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삶의 안정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기초가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의 연약함은 오직 하느님을 의지함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

특별히 하느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범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하나는

의로운 자들을 박해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나쁜 짓 하는 모든 자들

내 백성을 빵 먹듯 집어삼키는 저들 주님을 부르지 않는 저들.(14,4)”

 

마지막으로 이 시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불신앙의 세계로부터 받고 있는 시련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위로의 말씀을 주고 있다.

거기에서 그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니

하느님께서 의인의 무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14,5)”

무신론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느님은 언제나 의인의 편에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결국 의인이 승리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가련한 이의 뜻을 너희가 수치스럽게 만들지만

주님께서 그의 피신처이시다.(14,6)”

무신론자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마음대로 박해할지라도 하느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시온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베풀어졌으면!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실 때 야곱이 기뻐하고

              이스라엘이 즐거워하리라.(14,7)”

시온은 하느님이 임재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곳이다.

구원은 바로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을 바라며 시온에 거하는 자들은

              언제나 구원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