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회복을 알리는 상징적 행위(32,1-44)
*32장은 예언을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유다가 회복될 것이며,
또 지난날의 생활이 재개되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록 문서들을 포함해서 법적인 모든 절차를 이행하면서
사촌의 땅을 사들이기 위한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성취시킨다.
32,1-5 :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9년에 예루살렘 포위를 시작하여
11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므로 이때 유다는 아주 위태로웠다.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2절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에 바빌론 임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 왕궁 경비대 울안에 갇혀 있었다.”
여기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때 예레미야는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다.
예언자가 이처럼 갇힌 이유는 유다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끝까지 바빌론과 싸운다면
그들은 반드시 바빌론에 패할 것이고 유다 왕 시드기야는 바빌론에게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유다왕 시드기야는 “어찌하여 그대는 이러한 예언을 하는 것이오?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다(32:3).”
시드기야의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왜냐하면 그가 예언자를 가둔 일은 자신이 듣기 원치 않는 소리를 막을 수는 있었겠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시드기야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일에 힘썼을 것이다.
시드기야가 범한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모든 시대 하느님의 백성들 가운데
반복하여 범하는 어리석음이다.
32,6-15 :
하느님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숙부의 아들 하나멜로부터
구원자 권리를 행하라는 소식을 들게 될 것인데 그때 그 땅을 사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되어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포위되어 있었지만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예언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유다왕 시드기야는 “유다가 바빌론에 의하여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하여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32:3)” 라고 물으며
그를 붙잡아 궁중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의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특별히 예언 활동 초기에 예레미야는 선포한 메시지로 인하여 반대자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받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유다를 향하여 “너희는 바빌론과 힘을 다하여 싸울지라도
반드시 그들에게 패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때 유다의 애국자들은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때 이들을 격려해 주어야할 예언자가 오히려 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어찌 “민족에 대한 배반자” 라는 오해로부터 피하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32,16-25 :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멜로부터 토지를 매입한 후,
하느님께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쏟아놓았다.
예언자를 슬프게 한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도록 했으나, 현실은 예루살렘 성이 바빌론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예언자는 이런 현실에 대하여 슬퍼했던 것이다.
그는 어째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런 현실이 되었는지 살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이 오게 된 것은 유다의 범죄로 인한 것임을 말한다.
이처럼 예언자는 비극적인 현실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오게 된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말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을 창조주 하느님으로 고백하고(32:17)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심을 말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느님은 의인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죄인에게는 벌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32,18).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출애굽 사건은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큰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신지 확인해 주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했다(32:23).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처럼 죄 가운데 살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하느님에 대한 無知였다.
32,26-35 :
예언자가 하느님께 탄원하였을 때, 하느님은 그의 탄원을 들어주셨다.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레미야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을
바빌론의 손에 붙이신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 유다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바빌론의 손에 붙이셨다(32:27).
그것은 그들 가운데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권고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을 바빌론의 손에 붙이심으로
그들 가운데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려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백성들이 권고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을 때, 고통스런 환경이나
또는 육신의 연약함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죄의 원인들을 제거해 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에 대한 또 하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부모가 자식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하여 드는 사랑의 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2,36-44 :
그러므로 하느님은 바빌론을 통하여 유다를 징계하셨을지라도 징계의 목적을
이루었을 때에는 다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때 그들 가운데 회복의 은혜가 임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2:38).
이처럼 그들이 하느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될 때,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하느님을 경외하기에 힘쓸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통해 계시된 초대교회의 모습과도 같다(행전2:42-47).
또한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그들이 살고 있는 땅도 회복 될 것이다.
“너희는 지금 이 땅을 두고 사람과 짐승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어
칼데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하지만, 바로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게 될 것이다.
벤야민땅과 예루살렘 주변에서, 유다 성읍들과 산악 지방 성읍들에서,
평원 지대 성읍들과 네겝 성읍들에서 사람들이 돈을 주고 밭을 사서,
계약서를 꾸미고 봉인한 다음 증인을 세울 것이다.
내가 그들의 운명을 되돌렸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32:43-44)”
성경에서 땅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을 상징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 살고 있을 때,
땅은 언제나 그들에게 젖과 꿀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돌이켜 죄 가운데 살면 땅도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되었다.
이처럼 땅도 하느님의 백성들의 축복과 저주에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도 되고
황폐하여 들짐승조차 살 수 없는 땅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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