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예레미야서 공부

예레미야서 1장 공부 : 유다에 대한 신탁

윤 베드로 2017. 5. 1. 08:02

예레미야서 1장 공부 : 유다에 대한 신탁

 

1,1-3 :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사장 힐기야는 아비아달 가문의 후손이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충실한 자였으나

             다윗의 후계자로 솔로몬 대신 아도니아를 지지함으로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후손들은 아나돗에서 살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유다왕 요시야가 다스린지 13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시드기야 11년 말까지 예언 활동을 했다.

요시야는 B.C 640년에 왕위에 올랐음으로 재위13년은 B.C. 627년이 되고

               시드기야 재위 11년은 B.C.587년이므로 예레미야의 활동기간은 대략 40년이 된다.

이 시기는 유다 역사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한 위기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예언자로 부르심은 받은 예레미야의 삶은

                 항상 위기에 직면한 삶이었고 또한 그가 선포한 메시지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언제나 도전적이었다.

 

<유다에 대한 신탁>

 

예언자의 소명(1,4-10)

 

하느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시편139:16).

이것은 우리의 출생이 하느님의 계획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하느님은 우리의 출생 이전에 이미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여인의 태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살펴서 그 뜻대로 살 때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자신에게는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을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는 삶이라고 한다.

 

예레미야는 예언활동으로 부르심에 응답하기까지 다음의 과정을 거쳤다.

①하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것은 그가 “태중에서 나오기 전”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기까지는 예레미야 자신에게조차 숨겨져 있었고

            다만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준비 되어왔다.

②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까지

                       거쳤던 과정 가운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를 연약한 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다고 했다(1:6).

③또 다른 하나는 부르심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부적합함을 알고,

응답하기를 망설일 때 하느님은 그를 격려해 주셨다(1,7-8).

 

7-8절 말씀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지혜를 짜내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느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로 그것을 행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면 그에게 가면 되고

               또한 하느님께서 가서 전하라고 주신 말씀이 있으면 가서 전하면 되었다.

이것이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예언자의 직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代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말에 능력이 있어야 한다.

 

9-10절은 우리에게 말의 능력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말해 주고 있다.

예언자의 활동은 그 입에 말씀이 주어짐으로 시작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여

                그의 말이 모두 신적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하느님의 말씀이 임하여 그 말씀을 대언 할 때만 예언자의 말은 신적 권위를 갖는다.

그러므로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예언자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구해야한다.

 

첫 번째 환시와 계시(1,11-19)

 

하느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신 후, 두 가지 환시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 환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해 주심으로

             예언자로 하여금 위임된 활동에 대하여 보증을 삼도록 해 주셨다.

우리는 이 환시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은혜의 수단으로서

            환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환시는 그에게 위임해 주신

                   활동의 완성을 보증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예언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임한 말씀이

                속히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였고,

                자신이 전해야할 메시지에 대한 명료성을 갖도록 해 주었다.

하느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예언자로 하여금 활동의 과정에서 만나게 될 시련과

                문제들로 인하여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 질 때마다

이 환상을 기억함으로 다시 확신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마음에 각인 될 만한

                   은혜로운 사건들과 영적 체험들을 허락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마다 이런 은혜들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영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다.

 

11절,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보여주신 편도나무 가지는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주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 나무는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겨울이 지나서 봄이 올 때

                 최초로 흰 꽃을 터뜨리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이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은 봄이 가까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나무 환상은 예레미야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들이

             신속히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하느님은 편도나무 가지 환상 외에 또 다른 환상을 주셨다(1:13-15).

여기 “끓는 냄비”환상은 심판의 메시지로서 바빌론의 침략의 혹독함을 상징한 것이다.

이 냄비가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졌다는 것은

                유다가 바빌론에 침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유다에게 전하도록 받은 예언의 말씀과

                예레미야가 본 환상은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이 환상을 기억 할 때마다 자신이 유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백성들이 그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신 후에 17-19절에서 그로 하여금

                일어나 부르심을 받은 그 일에 힘을 다할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라”라는 말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위임해 주신 일을 위하여 힘을 다해 수고하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