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히브리서 공부

히브리서의 주요 내용

윤 베드로 2017. 3. 6. 08:44

<히브리서의 주요 내용>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1,1-2)

 

히브리서가 서신으로 볼 수 없도록 하는 서두이다.

이 짧은 구절에 히브리서의 주제가 담겨 있다.

구약성서와 유대 전통의 결말은 “아들”이라는 이 선언은

참으로 대담하면서도 확신에 찬 것이다.

다음에 전개되는 기나긴 서술은

어쩌면 이 선언의 해설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구약성서와 유대의 신앙전통에 정통한 사람으로 보인다.

“여러 번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논술은 이 저자가 얼마나 구약성서와

구약 전통에 精通한지를 충분히 가늠케 한다.

게다가 구약성서와 유대전통의 結末이며 結晶은

“아들”(예수 그리스도)이라는 표현은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 서있는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참으로 “아들”(예수)은 구약성서와 유대 전통의 결말이며 핵심이다!

그 아들이 이 “마지막 날”(종말의 때)에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교회의 설립은 종말의 시작이며, 새로운 시대(신약시대)의 시작인 것이다.

 

2.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2,8下).

히브리서의 기자도 “이미”(already)와 “아직”(yet) 사이의 신학을 표현한다.

자신과 교회는 “아들”에게 “이미” 복종하고 있는데,

만물은, 세상은 “아직” 복종하고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의 선교 사명이란 이 “아직”의 세력을 “이미”의 세력에

굴복시키려는 노력을 말한다. 진정한 교회는 “이미”의 편에 있으며

또 그 편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이것이 當爲이다.

나는, 우리는 어느 쪽인가? “이미”인가? “아직”인가?

 

3. “그러므로 ...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3,1)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를 “신앙의 사도”라고 불러야 하는

저자의 용기가 돋보인다.

당시 교회에서 “믿음-신앙”이 흐려져 가고 있었음을 반증이라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였다(12,2).

진정 예수가 죽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어 결국에는 하느님 오른편에

앉게 되기에는 그의 “순종” 이전에 그의 “믿음”이 있었다.

이점을 혼동하거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믿음이 예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순종”은 없다!

“믿음” 없이는 한 발 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는 일이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하고는 상관이 없다(11,6).

철저히 일관되게 구․신약성서는 이를 증명하고 해설하고 이야기한다.

히브리서는 참으로 “믿음의 복음서”이다.

대제사장의 중요 임무는 贖罪祭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수가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그의 속죄의 활동 말고도

구약의 전통을 완성한 분이라는 뜻이 그 배경에 있다.

예수는 구약과 전통의 완성자(결말)이다.

 

4.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3,13-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 “현재”만 있는 것이다.

적어도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생각했고 믿었다.

“오늘” 내가, “믿음” 속에 있을 때에, 내게 “구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믿음을 우리는 계속 “현재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 지금,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믿음 없이는 죄”라는 말과 상통한다.

“완고한”은 이전의 것에 절어 있어 돌이키지 않는 상태를 뜻하고,

 “믿음”은 새로운 가능성에 여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6,20).

 

저자의 구약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활동을 완성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가 다윗의 혈통이라는 교회의 주장에 의거하여,

유다 지파(7,14)의 예수는 제사직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하였음에 틀림없다.

저자는 구약성서의 신비한 전승 속에 자리한 “멜기세덱”을

재빨리 문제 해결의 典據로 인용한다.

예수는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근원조차 신비에 싸인 인물인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무슨 다른 ‘반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멜기세덱”은 그 이름에서 그 신분의 고귀함과 신비함을

자아내게 한다. ‘예루살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라는

그 이름의 뜻은 곧바로 “그리스도의 典型”임을 암시한다.

 

5.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7,27).

 

예수가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하신 일은 자기를 바쳐서

그림자인 성전 예배를 폐하고 “새 계약”(8장)을 중재하여

참 예배를 세우신 것이다.

낡고 오래된 옛 계약은 예수에 의하여 새로운 계약으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피는 결정적으로 새 계약의 증거요, 표가 되었다(9장).

예수는 결정적으로 結晶이 되었던 것이다.

 

6.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그들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10,14. 16).

 

예수가 “그날”즉 “시대의 종말에”(9,26) 한 번 자기를 바치신 사건은

“율법”(구약성서, 유대의 신앙전통 그리고 신약성서까지!)을

자신의 추종자들의 마음에, 생각에 새기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기나긴 문서로 쓰여졌던 저 구약성서가,

이제 지리하게 이어오던 유대의 신앙전통이 結晶이 되어

“새계약”의 형식으로 “예수따르미”들의 마음과 영혼 속에새겨진 것이다.

“새계약”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계약 백성들의 마음과 영혼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신약성서”는 이 “새계약"의 증언록일 뿐이다.

 

7.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10,35) ....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12,2).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제 “믿음”과 좀 더 강한 표현인 “확증”으로

그의 논술을 진행한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위대하고 거룩하며 완전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임을 저자는 안다.

저 “십자가 이야기”가 내게 “십자가 사건”이 되려면 “믿음”이 작용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아예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지칭한다.

사실, 예수가 하느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로까지 昇貴하게 된 것은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희망하는 것이다. 하여, 믿음은 소망(희망)과 같이 간다.

믿음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케 하는 원동력이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상을 현실로,

기적을 사실로 만드는 힘이요 원리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가 믿는 대로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고귀한’ 것임을 믿고 그 십자가에

내가 믿음으로 동참할 때 나도 ‘고귀한’ 인생이 될 것이다.

예수운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믿고 동참할 때

우리는 세상에 ‘필요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8.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12,14).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십시오.”(13,1).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戰場에 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새 나라의 새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까지 기꺼이 져야 하지만,

새 나라 즉 믿음의 공동체(교회) 안에서는 화평하고 거룩하며

계속해서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을 환하게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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