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8> 로마서(下)
인류 구원 위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
▲ 미국 애틀란타대교구장 윌턴 그레고리 대주교(오른쪽)와 루터교 세계 연맹 이스마엘 노코 목사가 2009년 시카고에서 열린 '가톨릭-루터교의회교리에 관한 공동선언' 10주년을 기념하는 기도회장에 입장하면서 성수를 찍고 있다. 양 측의 의화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은 교회 일치운동의 큰 성과로 평가된다. [CMS]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이 선택하고 율법을 주신 백성'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긍지를 갖고 이야기한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행위로 얻을 수 있다는 오만에 빠졌기 때문이다(로마 9,31). 사도는 이를 '잘못된 열성'이라고 비판했다. 비록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상태이기에 그 자리를 다른 민족이 차지하지만, 다른 민족의 자리가 채워진 다음에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11,26). 하느님 역사하심으로 불경함이 치워지고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뜻이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역시 이와 같다. 사도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로움을 얻고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때 느닷없이 구원자가 나타나 그 불경을 씻은 것이다. 사도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심으로써 불경을 씻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절대적 낙관을 보인다.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11,32). 결국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모두가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사도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불순종을 넘은 절대적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을 찬미했다(11,33-36). 사도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삶의 척도이자 장차 로마제국과 같은 국가 운영에 대한 최종 판단기준이 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랑은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일 수 있는지 살펴보자.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박해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 역시 과거에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삼고 있다. 사도는 하느님 사랑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표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율법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법에 대한 최종 목표로 여겼다. 그 핵심 주제는 하느님의 정의와 의로움이다.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도 하느님은 끝없이 의로움을 보여주시는데, 당신 외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한 사건이 결정적이다. 믿음만을 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해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의로움은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의로움은 하느님이 본래 뽑으시고 약속하신 당신 백성이지만, 현재 불순종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마저 구원한다. 그 결과인 사랑을 설파하며 교회 간 일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역사에서는 로마서 때문에 가톨릭과 루터파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은 로마서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가르침대로 의로움 안에서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의 서간은 친서 외에도 제자가 사도의 이름을 빌려 쓴 위서(에페, 1ㆍ2티모, 티토)가 있다. 고대에는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을 빌려 출간하는 사례가 많았다. 사도 역시 직접 쓴 서간에도 공동 저자를 거론하며 인사말을 전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때문에 제자들이 스승이 돌아간 뒤 대리자라는 의식을 갖고 스승 이름으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부부간의 일치와 비교한 것이다(에페 5,30-32). 이는 사도가 결혼에 대해 부정적 입장(1코린 7,8-9)을 취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사도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 하기에 결혼은 차선책으로 제시했다. 이는 사도가 자신의 생애 중에 주님이 재림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에서처럼 종말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조바심은 찾아볼 수 없다. 하루하루 깨어 살아야 하지만 일상 역시 소중히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창세기에 나타난 혼인 의미를 되살린 것이다.
<가톨릭대학 성서신학 교수 백운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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