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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

윤 베드로 2015. 1. 19. 17:27

☆성사

 

1. 성사는 예수님이 남기신 정표

 

*사람은 : 정(情)을 지닌 동물이다.

정 때문에 울고 웃고 하며, 그 정을 추억하며 흐뭇한 미소에 잠기기도 한다.

그 정을 길이 간직하려고 정표를 주고받기도 한다.

보이는 물건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담아둘 줄 아는 게 사람이다.

 

*이처럼 우리의 소중한 마음과 추억을 담고 있는 사물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가족이 함께 쓰던 찻잔, 어머니가 쑨 옥수수 죽,

           성탄절에 선물 받은 굵직한 양초, 꽃병, 고향 마을 오솔길,

            아버지가 남겨 놓으시어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낡은 책상,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옛집 등등….

 

*이런 사물들에서 우리는 無言의 말을 듣는다.

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들 목소리와 메시지를 듣게 된다.

이들은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면서 그 안에 현존하는 그 무엇을 간직하고

           표현하고 회상시키고 보여주며 전해 준다.

 

*상징이나 징표를 원하는 사람의 속성을 하느님께서는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표현하시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건들을 사용하신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회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수긍하게 된다.

 =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이러한 피조물들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 활동이 표현되는 수단이며, 동시에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인간 행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생활을 위한 표징과 상징도 마찬가지다.

       씻고, 기름 바르고,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행위들은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 현존을 드러내며 창조주께 대한 인간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148항).

 

*사람은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손으로 만지고 싶어한다.

심지어 하느님 사랑까지도 무언가 보이는 것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의 욕구를 하느님은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당신 사랑을 드러내주셨다.

이것이 바로 聖事다.

  ⇒요컨대,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거룩한(聖) 은총을

                  보이는 것(事)을 통해 베푸시는 것을 聖事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사랑의 보이는 정표로서

           남겨주신 성사의 전범(典範)이 성체성사이다.

 

*마지막 작별의 때가 오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빵으로 볼 수 있게 해 제자들에게 나눠주셨다.

당신 몸을, 곧 그 만큼 사랑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놓으셨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 26,26).

이윽고 예수님은 당신 피를, 죄의 용서를 위한 계약의 증표로 내어주셨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실제로 예수님은 :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 말씀을 이루셨다.

이로써 양의 피 흘림을 통한 구약의 파스카(희생) 제사가

          예수님 피 흘림을 통해 완성됐다.

θ 구원 섭리가 예수님 십자가 제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완수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 당신의 이 기묘한 사랑의 업적이

             모든 세대에 대물림하며 생생하게 재현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명하셨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그 덕에 우리는 : 오늘도 '밥'이 되시는 예수님을 먹으며 살고 있고,

         그 피흘리심의 능력으로 날마다 죄를 용서받으면서

         '거룩한 사람'(사도 26,1)이 되어 감지덕지하게 살고 있다.

 

*성체성사뿐이 아니라

       다른 성사들에도 이러한 자기 희생적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모든 성사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몰아적 사랑이다.

 

2. 성사는 의무가 아니라 은총이다

 

*자동차 회사에서는 :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려고

            '서비스 센터'를 설치해 애프터 서비스를 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 인간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놓고

           '서비스 센터'동네마다 세워 놓았다.

            聖殿이 바로 그것이다.

⇒성전은 : 공인된 靈的 주유소요, 서비스 센터다.

                  거기 가면 하느님이 직접 채용한

                  직원(성직자, 수도자, 봉사자 등)들이 애프터 서비스를 해준다.

 

*가장 중요한 애프터 서비스 프로그램으로 7성사가 제공되고 있다.

그러니까 7성사는 :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배려라는 말이다.

            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단계마다

               우리를 영적으로 돌보아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가 바로 7성사라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완벽한 토털 서비스!

          이것이 바로 7성사가 지니는 의미이다.

 

7성사는 :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한 사람의 영적 일생을 동반해 준다.

                   삶의 각 단계에서 마다 결정적 은총을 베풀어줌으로써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이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도록 도와준다.

 

*이에 대해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이 일곱 성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모든 단계와 시기에 관계된다.

          성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며,

          치유하고 사명을 부여한다. 이 점에서 자연적 삶의 단계들과

          영적 삶의 단계들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210항).

 

*그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

      태어남(세례성사) → 양육됨(성체성사) → 성숙함(견진성사) →

      타인을 위한 봉사 1(혼인성사) 또는 타인을 위한 봉사 2(성품성사) →

      용서(고해성사) → 치유(병자성사) 또는 죽음(병자성사)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7성사는 : 개신교와 대치 중에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를 통해

                  공식적 구원 통로로 선언됐고

                  이후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를 통해 더욱 공고하게 확인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7성사를 구원을 위한 유일한 통로라는 입장을 완화했다.

  이는 개신교와 오랜 대화와 일치 운동을 추구해 온 결과였다.

 

⇒확실한 것은 이런 관점 변화는 : 7성사 중요성이 약화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은총의 통로라는 말이다.

 

*참고로, 개신교에서는 가톨릭 교회와 다른 성사관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

①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일부 요소만 인정한다.

②나머지 다른 성사들은 : 예수님이 회복시킨 하느님과 관계를

                                        부정하는 교리라 여기고

             우상숭배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다.

 

성체성사 경우에도 : 성변화와 성체 안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현존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한다.

⇒따라서 개신교 관점에서 성체성사는 :

            '최후의 만찬'을 단지 기념하는 차원이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의미가 아니다.

 

④밀떡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성체성사'가 아니라 단지 '성찬 예식(성만찬식)'인 것이다.

 

또 개신교는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1 대 1로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한다.

⇒개인적으로 용서를 청하고 나서 그 죄가 사해졌는지 사해지지 않았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사죄권이 오직 그리스도 한 분께만 있다고 주장한다.

 

⑥개신교는 말씀 전례만을 중요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을 '성사의 교회'라 부르는 반면에

           개신교를 '말씀의 교회'라고 부른다.

 

*성사를 잘못 이해하면 '짐'으로 여기기 쉽다.

특히 '고해성사'는 신심이 깊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사는 '은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어 주기 위해서 성사를 제정하신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이것이 우리에게 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한결같은 의중이었다.

그러므로 성사의 불편함이나 번거로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성사를 통해 얻게 되는 무한한 은총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이 은총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이 성사의 은총은 다시 우리 믿음을 굳건하게 해준다.

"성사는 신앙을 전제할 뿐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업적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기르고 굳건하게 하고 드러낸다.

                그래서 신앙의 성사라고 한다"(전례헌장, 59항).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고린 11,26)

                주님의 신비를 기념한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열렬히 기다리면서 성사를 거행하는 것이다.

이토록 엄청난 선물인 성사도 새 하늘 새 땅에서 누릴

           천상 전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회 성사들에서 그 천상 복락을 앞당겨 맛보는 것이다.

 

*성사의 은총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성체를 자주 영하는 사람은 그만큼 은총을 많이 누린다.

같은 신자라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에게서

        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성체를 자주 영하는 사람은 그만큼 성체 체질이 형성돼

           인격과 신앙이 남달라지는 것을 흔히 확인하게 된다.

 

*고해성사를 자주 보는 사람은 그만큼 기도 생활이 잘 이뤄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는

            약속이 있거니와 고해성사를 자주 보아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 '하느님을 뵙는' 은총을 누린다.

 

*요즘 우리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관심 때문에 주변에 있는

         세례․견진․혼인․병자성사 대상자들이 은총에서 멀어진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이 다시 성사의 은총을 누리는 受惠者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랑의 행위에 속한다.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