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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

윤 베드로 2014. 11. 15. 21:44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

 

 

 
글. 조중형

율법 복음
1 첫언약 히8:7, 히9:1,15,18 새언약 마20:28, 눅22:20, 고후3:6
2 모세를 통해 주심 요1:17a. 예수로 말미암아 왔음 요1:17b.
3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줌 사30:18,민 15:32-35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 요13:34, 요일4:9-10
4 법으로 대하심 민19:2, 롬7:8,9,21 사랑으로 대하심 요일4:16
5 정죄함 롬5:16 속죄함 히9:12, 골1:14
6 죄로 죽게함 롬5:12, 롬6:23 은혜로 살림 엡2:1
7 허물을 찾음 요8:2-5 허물을 덮어줌 벧전4:8, 약5:20
8 행위를 요구함 창17:1 믿음을 요구함 요3:14-16, 롬10:9
9 행하면 육이 살음 겔33:14-15 믿으면 영이 살음 요5:24-25
10 세례요한 때까지 눅16:16 영원함 히9:12
11 종으로서의 삶 갈4:3,24 자녀로서의 삶 갈3:26, 갈4:5-6
12 그 아래 있는 이는 모두 죄인 롬5:8-9 그 아래 있는 이는 모두 의인 롬3:26
13 유대인에게 주신 것 롬2:17-18 인류에게 주신 것 요3:16
14 율법 조문으로 섬김 롬7:6 영으로 섬김 롬7:6
15 짐을 지움 마23:4 짐을 벗겨줌 마11:29-30
16 행하라 명령함 레25:18 다 이루었다 들려줌 요19:30
17 헌물을 드림 민6:17 마음을 드림 골3:23
18 훈육선생과 초등원리 갈3:24-25, 갈4:3 가르치는 자와 의의 말씀 히5:12-14
19 혼으로 믿음 마26:33-35 영으로 믿음 마16:16-17
20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함 행13:39 의롭다함을 얻음 롬3:24
21 양이 죽었음 대하29:23 목자가 죽음 요10:14-15
22 기복신앙을 추구함 신28:1-6 영적 질적, 진리의 신앙 추구함 마5:3-12
23 죄를 알게 함 롬3:20 죄를 사면받게 함 롬3:25
24 온전케 할 수 없음 히7:19, 히10:1 온전케 했음 히7:28, 히10:14
25 넓은 길을 추구함 마7:13 좁은 길을 추구함 마7:14
26 장소 중심의 경배 요4:20 영과 진리로 경배 요4:24
27 원수를 미워하고 사1:24 원수를 사랑하고 눅6:27-28
28 보복을 함 렘51:56, 나1:2 보복이 없음 마5:44
29 높아지려고 함 신28:13, 욥21:22 낮아지려고 함 마23:11-12
30 상징 출12:7,15 실제 고전5:7
31 속박함 롬7:6, 요8:31-34 자유함 갈5:1, 롬8:2
32 조건이 있음 신23:21, 겔20:40 거저줌 마10:8, 엡6:8
33 물량적임 렘45:5, 시131:1 질적임 마22:14, 눅12:32
34 형벌이 있음 행26:10-11, 출34:7 형벌이 없음 요8:3-11
35 저주가 있음 신30:7, 갈3:10 저주가 없음 갈3:13
36 불안함 시43:5 평안함 요16:33, 롬8:6
37 속박의 영을 받게 함 롬8:15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게 함 롬8:15
38 죄를 억제함 롬7:23-24 죄를 제거함 사43:25, 44:22
39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6:5, 10:12 너를 사랑하신다 요일4:9-10
40 절기를 지키라 하셨음 레23:33-44 절기를 폐하셨다 하셨음 골2:14-17
41 구원의 확신이 없고 렘8:20 구원의 확신이 있음 엡2:5,8
42 가나안 땅을 주심 수5:10-12 왕국을 주심 마5:3, 딤후4:18
43 자기 의를 세움 롬10:3 하나님의 의가 드러남

 

  율법과 복음의 차이

     

 

 

 

복음은 가장 남용되고 오용된 단어중 하나입니다. 복음을 규명하고 정의하는데 있어 종교개혁의 원리는 복음을 율법으로부터 구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신학에서 그는 복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자석 또는 전기회로의 양극과 음극와 같아서, 한쪽을 다른 쪽으로 측정함으로서 그 한쪽의 현재 또는 힘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1.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성서전체의 중심적 주제이고 매일의 생활이 지니는 중심적 경험입니다. 신학적으로 성서전체는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두 가지 기본적인 메시지가 있는데, 한 메시지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며, 다른 한 메시지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메시지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반역하는 인간을 사랑하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2. 율법이 없이는 복음의 성격과 목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서에서 율법의 메시지와 복음의 메시지 사이의 대조를 발견하는데 예를 들면 요한복음 3:16-17에서 “영생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율법과 복음 사이의 이러한 균형을 발견합니다. 출 20:2에서는 십계명을 주시기에 앞서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으로부터 율법의 동기와 책임이 발생하며, 율법으로부터 복음의 필요성과 부름이 발생합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을 요청하며,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율법을 향한 책임과 행위에 대한 동기가 생겨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율법안에 있으면 복음의 은혜와 자유를 누릴 수 없으며, 복음안에 있다고 하여도 율법의 행위를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에는 율법에는 없는 자유와 해방이 있습니다.

 


3. 매일의 삶에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경험됩니다. 율법은 이 타락한 세상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 타락한 세계를 그 나름대로의 과정을 달려가면서 우리는 율법으로 인해 정죄되고 있는 세계자체를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의하여 자신들을 파괴하고 다양한 경험 (불안, 부정의, 착취, 수치, 죄책감, 병, 비참함)등 이 모든 것은 매일의 생활의 지니는 율법의 경험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나 이 세계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며, 모두 심판을 받아 마땅하며, 그 사이에서 서로를 심판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매일의 율법적 실존으로부터 율법의 종교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그들의 불안을 그에게 투사시킴으로 그들의 기본적 불안을 감축시키고자 합니다. 그들은 보호와 축복을 얻기 위하여 그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두려움, 죄책, 자기추구, 불안이 종교적 사고와 실행을 특징짓습니다. 대중적 수준에 있어서 종교는 우리가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이용하여 얻으려는 추구입니다. 이같이 타락한 종교는 회교 사원, 불교사원 또는 교회 건물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이러한 모든 종교성과 대립됩니다. 복음적 요청은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의 목적을 위해, 그에 의하여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더불어 생기는 문제는 그 복음이 우리의 모든 자연적 인간 사유와 욕망과 상충된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 가운데 편리한 부분만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의 절대적인 요구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자유로운 선물도 원하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립니다.

 


4. 복음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응답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그 과정중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 6:33)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의존되어 있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며 우리에 의해 지배되는, (일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으로 이루어진 평안한 종교를 전하기를 좋아합니다. 인기있는 종교성은 관대하고 유용하지만, 복음은 절대적인 요구를 하며 우리를 사용할 것을 구합니다. 우리의 설교에서 기독교적 생활을 개선하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마치 그들이 그의 뜻을 행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호소합니다. 이러한 호소는 무슨 거래 과정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을 행하고 우리는 기대하는 것을 받는다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식의 동기부여는 근본적인 복음의 요청을 일상적인 종교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하나님)는 자기에게 예배하고 봉사하는 자들에게 더 신뢰할 수 있게, 더 능력있게 축복을 베푸는 자가 된다. 그것은 힌두교의 신 크리쉬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든 동일하게 회심이 없는 이기적인 종교입니다.  Herbert E. Hoefer는 우리의 모든 설교와 기도에서 “축복”이라는 용어를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축복”이란 용어는 무의미한 용어가 되어 왔으며,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고도로 물질주의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5. 종교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에 열심이게”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갈 1:14) 율법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연종교적 사유는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우리는 자신에게 요구된 것을 행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에 관하여 좋은 결과가 주어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 대하여 좋게 말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종교성은 현재 이 사회에서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위하여 모두 안전감과 보장감을 느끼는데 필요한 최소치를 행하는 방법이 됩니다. 사실상은 죄만 증가하게 됩니다. (롬 5:20) 최소치로 만족해 버리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깊은 부름을 향하여 닫아버리게 되며, 율법에 대한 열심은 우리의 마음을 자기 만족과 자기 의로 채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의 약속가운데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위탁은 어떠한 종교적 공동체가 자신에게 할당하는 것을 훨씬 능가합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 2: 기능들

 


율법은 복음의 세 기능들에 의하여 응답되는 세 가지 기능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적 설교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들이 생에 있어서의 그들의 참된 삶의 상황을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때로 율법을 설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삶을 위한 성령의 변형시키는 능력에 개방되어질 것입니다.

 


1. 율법의 기능들.

(1) 거울. 율법의 첫 번째 그리고 주된 기능은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고 또 원하는 것이 되는데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미 양심에 의해, 경험에 의해 고소당한 상태에 있으며, 이것이 인생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인 종교생활에 있어서 쉽사리 피상적이고 자기 만족적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몇가지 삶의 실천, 선행을 통해 우리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참된 메시지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롬 3:19)”이 됩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역과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대로 보며 복음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위한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연석. 연석이란 자동차, 자전거, 등이 보도로 들어오거나 사람들을 상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로를 따라서 놓여진 방어막을 말합니다. 율법은 사회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무모하게 상해를 가하는 일이 없게 막습니다.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할 수는 없지만,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모든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으며, 구약의 율법역시 이스라엘 사회의 법입니다. 성, 재산, 결혼, 정부, 정의 같은 모든 것을 통제하여 사회적 안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갈 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율법, 정부, 양심, ‘후견인’이 되는 종교를 주셨습니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는 동기를 주신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안내.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건전한 행위에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분별하도록 해 주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고소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닮아 그대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모델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이 율법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죄되고 죄책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복음안에 있다 해도 우리의 힘으로 은혜안에 거할 수는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2. 복음의 기능들.

(1) 위로. 율법의 거울로서의 기능으로 인해 우리는 정죄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복음이 주는 답변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며,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롬 5:8) 율법과 복음이 가지는 첫째 기능의 역동성은 바로 회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참된 기독교적 삶의 시작이며, 용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기회입니다.

 


(2) 재창조. 새로운 회개의 삶은 복음의 능력에 의하여 주도되고 또 효력을 발생하는데, 복음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좋은 능력입니다. (롬 1:16) 이 구원은 죄의 영원한 효력(죽음과 정죄)에서 뿐만 아니라 죄의 현재의 능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새로운 능력은 외부적으로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안에 있는 새로운 영이 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줄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99%는 부작위(不作爲)의 죄입니다. 부작위란 말은 “의무 불이행”, “태만”이라는 죄입니다. 죄에는 omission과 commission의 죄가 있는데, 부작위(omission, nonfeasance)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소극적인 죄)이며, commission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죄”(적극적인 죄)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렘 17:10, 삼상 16:7, 왕상 8:39, 롬 8:27, 계 2:23)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이 악의 파급을 막는 것이었다면, 복음의 두 번째 기능은 재창조의 능력으로 인류를 변화시키는데 대한 희망을 얻습니다.

 


(3) 자유케 함. 복음의 세 번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변형의 최종단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안내를 말했는데, 이제 복음으로서 이 죄에 대한 옛 속박은 깨어졌고,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롬 6:18) 죄의 세력과 율법의 몸가짐으로부터의 이러한 새로운 자유를 성령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특별한 특징입니다. 기독교인은 더 이상 자신의 성행에 대한 어떠한 보상, 어떠한 인정, 어떠한 사례, 어떠한 감사도 기대하지않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합니다. 기독교인의 선행은 이제 새로운 본성입니다. 보상을 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랍니다. 선을 행하려는 새롭고 자발적이고 관대한 의지를 가진 것, 이러한 자유가 복음안에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기능들은 상호간의 역동적인 관계속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양자는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한가지 선한 뜻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선물을 왜곡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의롭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위탁을 피하게 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은 죄의 힘입니다. (롬 7:7) 율법의 선한 목적은 죄의 세력이 깨뜨려져야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 승리하는 능력은 복음을 통하여 성령(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정적인 어떤 속성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롬 1:16-17) 이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구속적인 의에 대한 재발견은 구약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을 촉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인 동시에 복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미 만물을 의롭게 하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의를 위해 일하십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율법들은 압박받는 자들을 속박으로부터 보호하고 해방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복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다른 종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은 새로운 요소입니다. 그는 의로써 판단하시고 의를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율법과 복음이 지니는 독특한 소식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왼손, 오른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탄이 창조물가운데 완전한 혼돈을 일으키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복음은 악을 대항하고 의를 수호하기 위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충성된 동반자로 변화시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수용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기쁨’이 됩니다. (시 119)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은 복음 충만한 마음에 있어서는 자유케 하며 풍요하게 하는 순간이 됩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이 둘의 분명한 이해는 우리는 믿는 성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안에는 신학의 부재시대, 다시 말해서 성서신학적 연구가 빈약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없이 성경을 단지 하나의 종교적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라고 하는 책속에 갇히신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속에서 인간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시는 인격의 주체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이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이 두가지의 긴 역사성과 역사적인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를 해야만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이 둘의 큰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적기 때문에,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고 창세기나 요한 계시록을 같은 시각과 해석력을 가지고 읽습니다. 실상은 해석할 아무런 도구나 사전 지식이 없이 성경을 봄으로써 성경을 함부로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1. 율법과 은혜

 


신약을 복음이라고 한다면, 구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나, 구약에는 전체적으로 율법아래 있는 예언이며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법제화된 율법은 실제로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약 2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이후 430년이나 지나서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갈 3:17-18) 그런데 율법이든 신약의 복음이든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려고 쓰여진 책들입니다. 때문에 율법과 복음이라는 말을 대조시키기 보다는 율법과 은혜라는 말로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 율법과 복음은 사실상 대조라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이고 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율법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불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질서와 백성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율법이 분명하게 주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은 주전 4114년경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에 태어났으며 아담후 1948년 이후입니다. 출애굽은 주전 1446년에 이루어졌고,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1446.2-1445.3)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후 이스라엘백성도 역시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자체가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으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전체를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범주가 존재합니다. (1) 도덕적인 율법의 계명 (출 20:1-26, 십계명), (2) 재판 (민법) (출 21-24장), (3) 의식 (출 24-31장 & 레위기의 대부분).

 


2. 율법의 바른 이해

 


율법이 당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보호하고 질서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한 시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요1:17) 복음이 분명히 나타나기 전까지만 율법이 유효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을 때의 모습은 심판의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계속 머물러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감사하지도 않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조건이 붙은 순종과 축복을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으며 자신들의 중한 죄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수 있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고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도 은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은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안에 이미 복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이 은혜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더해진 것일 뿐이다. (갈 3:19)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게 될 것이다. 이 조건이 붙은 율법에는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삶의 축복을 전제로 한 유대교인들은 바로 이 율법의 축복을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오해의 문제가 있다. (1) 율법주의 (legalism):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이 쓴 책이 로마서입니다.

(2) 반율법주의 (Antinominism):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살아갈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 야고보서 &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3) 갈라디아주의 (Galatianism): 우리가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것 역시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정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롬5;13) 율법이 있기 전에는 양심만으로 인간의 죄를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생각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정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정죄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로운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나, 인간의 죄를 밝혀줄 뿐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켜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율법은 시대적으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은혜로 구원받을 때까지 몽학선생(초등교사)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율법은 인간의 축복과 저주를 약속하지만 축복을 받으려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저주,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사망과 저주의 문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이 저주를 끊어내는 십자가의 은혜가 율법의 저주를 중단시키고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온전한 은혜가 시작된 것입니다.

갈 3:24-25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부유한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노예)이란, 옛날에 서당에서 한자를 배울 시절에 학생들이 서당에 안가고 땡땡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유지들이 합심하여 타 동내에서 하인을 하나 사서, 학생들을 집에서 서당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게하고 학생들 공부하는 동안 장작을 팬다던가 서당 선생님 뒤 바라지를 하게 하기 위한 하인으로 글은 가르치지 않고, 양반 자재들을 집에서 서당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일만 하는 가짜 선생이며, 학생들이 그 하인(가짜 선생)의 말들 잘 듣게 하기 위하여 붙여준 이름이 몽학선생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몽학선생 번역은 아주 잘 된 것이다. 최근 개역판은 “초등교사”라고 하여 그 의미가 다시 불분명해졌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죄없으신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율법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타나났고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은혜안에 있게 되면 그를 힘입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롬 13;10)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롬 8:3-4) 굳게 세우는 것이다. (롬 3:31) 율법에서 해방되고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 6:2, 약 1:25) 율법안에 희미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의, 그 은혜와 사랑의 빛은 복음안에서 분명해졌으며, 온전히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율법안에만 있다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복음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양심과 율법안에서는 충분히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의 세력의 힘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었지만 그 죄와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데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율법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헛된 욕망과 자기 만족적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죽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자주 율법적 삶과 행위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그 역할을 오해한 때문이며, 율법적인 삶이 인간으로 하여금 쉽게 종교적인 생활을 정의해 주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의 한 도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하나의 종교적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 유대교를 믿은 이들이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바울의 말대로라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주일성수

 

주일과 안식일 교리도 날짜변경선 문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나타나는 시차 문제만 생각해 보아도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날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요 5:17~18).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완성된 신약에서는 모든 날이 동등하게 귀한 날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구약의 안식일의 실체(참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와 있는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 안식이 완전하게 완성될 때까지 안식에 들어가고 있는 자들입니다(히 4:1~11). 우리는 영원한 안식이 완성되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미 영원한 안식에 들어와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지막 날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미 영원한 안식에 들어와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히브리서와 바울 서신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히브리서와 바울 서신의 전체 주제이기도 합니다. 율법과 복음을 구별할 수 없으면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경은 그들에게 닫혀 있는 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면서 율법과의 마찰이 발생하게 되는데 사도행전 15장에 언급된 예루살렘 공회는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고 결정을 내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조상들과 자신(유대인)들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율법)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라고 언급하면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사도 베드로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써서  유다와 실라를 통해 전달합니다.

 

초대 교회는 십일조 헌금을 요구하는 한 적이 없었습니다. 십일조 헌금은 신정정치국가였던 이스라엘의 사회보장성격의 국가세금제도였습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약적인 제사장과 성전(또는 성막)이 사라졌으므로 십일조도 당연히 사라졌습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성전(또는 성막)에 가서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던 율법입니다.
신약 교회는 십일조 헌금을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십일조 헌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농업이나 목축업이 주업이었던, 농경사회였던 이스라엘의 국가세금제도는 가축은 소득의 약 1/10을, 토지소산은 수입의 약 23.3%(3년 동안의 평균치)를 반드시 성전까지 가서 제사장에게 현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
● 가나안 땅을 상속받지 못한 레위사람들을 위해 가축이나 땅의 소산 중에서 바치는 십일조(레 27:30~33, 민 18:21~31).
●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절기 행사를 위해 땅의 소산 중에서 바치는 십일조(신 14:22~27).
● 마을의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땅의 소산 중에서 모아 두었다가 3년에 한 번씩 바치는 십일조(신 14:28~29, 26:12~13).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율법을 지켰던 사도 바울(고전 9:20)은 십일조 헌금을 했을까요? 하지 않았을까요? 율법으로 따져도 사도바울은 천막만드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이것은 십일조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막 만드는 일을 해서 번 돈은 가축이나 토지소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 대상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 9: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고전 9:20    유대 사람들에게는, 내가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9:23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8:1~15은 극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롬 15:26))들을 구제하기 위한 연보에 관한 것입니다(롬 15:27). 사도 바울은 극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형편에 맞게  연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고 했고(고후 8:12),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고후 9:7).

신약성경에는 십일조 헌금을 요구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극심한 흉년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구제헌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고전 8:1~15과 롬 15:26).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낸 헌금은 주로 구제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지원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고후 8:13). 그리고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고후 9:7).

 

사도들과 그의 동역자들은 예배당 건축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모아서 대형교회를 만들려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대형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형성되려면 길목 좋은 곳에 대형건물을 건축해야 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모습은 건물건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대형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들과 그의 동역자들은 모이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정집에서 모이거나(고전 16:19, 몬 1:2) 야외에서 모였습니다.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림자의 역할은 끝나면서 사라집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유월장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바쳐질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대제사장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의 유효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유효하며 더 자세히 말하면 십자가 사건 때까지 유효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육체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폐지하셨습니다.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의 전체 문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언약(히 8:7, 히 8:13, 히 9:1, 히 9:15, 히 9:18, 히 10:9) = 죄와 사망의 법(롬 8:2) = 율법 =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롬 7:6) = 옛 언약(고후 3:14) = 종의 멍에(갈 5:1) = 돌판에 쓴 것(고후 3:3) = 돌판에 문자로 새긴 율법(고후 3:7)

두 번째 언약(히 8:7, 히 10:9) =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갈 6:2) =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롬 7:6) = 새 언약(렘 31:31, 고후 3:6, 히 8:8~9, 히 8:13, 히 9:15, 히 12:24) = 자유를 주는 율법(약 1:25, 약 2:12) = 마음에 새긴 법(고후 3:3) = 영으로 된 것(고후 3:6)

 

율법의 유효기간 :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갈 3:19, 갈 3:23~25)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엡 2:14-15, 골 2:14)

 

율법의 폐지
엡 2:14~16, 골 2:14~16, 히 7:18, 히 8:7, 히 8:10, 히 8:13, 히 10:9, 히 10:16, 갈 3:19, 갈 3:23~25, 갈 5:1, 롬 7:6, 롬 8:2, 롬 10:4, 눅 16:16, 요 1:17


(모형과) 그림자 ----> 실체
1. 유월절 어린 양 ---->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2. 안식일 ----> 그리스도안에 있는 안식(구원)(히 4:1-11)
3. 성소 ----> 하늘 성소(히 9:24)
4. 성전 :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히8:5) ----> 그리스도의 몸(요 2:21)과 그리스도인들(고전 3:16),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계 21:22)
5. 짐승의 피 ----> 그리스도의 피(히 10:19, 히 10:22, 히 10:29, 히 12:24, 히 13:12, 히 13:20)
6. 첫 열매 ---->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고전 15:23, 계 1:5)
7. 휘장 ---> 그리스도의 육체(히 10:20)
8. 제사장 --->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히 7:21, 히 7:24)
9. 대제사장 ---->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히 7:28, 히 8:1, 히 9:11)
10. 십일조 ---> 맏물로 오신 그리스도
11. 할례 -->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롬 2:29).
12. 현재의 육체 ---> 미래에 부활할 다시는 썩지 않을 신령한 육체(고후 15:34-54)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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