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05.08 김수환 추기경 출생
서임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4999
선종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3863
1922년 5월 8일, 김수환 추기경이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출생했다.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5남 3녀 중 막내. 그의 조부 김보현(요한)은 1828년 무진박해 때의 순교자였고, 부모인 김영석(요셉), 서중화(마르티나) 역시 그 순교자의 신앙을 이어받은 후예들이었다. 부친때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 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 대구에 정착하게 된다.
모친의 권유에 따라 일찍이 성직자의 삶을 결심한 그는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여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주간 가톨릭시보 사장 등을 거쳐 1966년 마산 교구 설정과 함께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그해 주교가 됐다.
이후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된다. 이때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봉사하는 교회,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했다. 1969년 드디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다. 당시 136명의 전세계 추기경 중 최연소 추기경으로 기록된다.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을 물러나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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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신의 심부름꾼’으로 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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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金壽煥 ]
1922. 5. 8 경북 대구~2009. 2. 16 서울
신부·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8·15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7년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聖神大學)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에 졸업,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주임신부로 사제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1953~55년 대구 대주교의 비서신부·재정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지냈다. 1953년에는 대구교구가 설립재단인 김천시 성의(聖義)중·고등학교 교장과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의 주임신부를 겸임했다. 1956년 10월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했으며, 그해 1964년 6월부터 2년 동안 주간 가톨릭 시보 사장을 지냈다.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5월 31일 마산교구장으로 서품되었다.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의 기류 속에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뒤를 이었다. 1969년 4월 25일 교황 파울루스 6세에 의하여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70~75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1차 부임했다. 1970년에서 3년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으로 재임했고, 1981~87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2차 부임했다.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5월 미국 노틀담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88년 11월 일본 조치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90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90년 10월 미국 시튼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94년 연세대학교 명예신학박사, 1995년 타이완 푸젠 가톨릭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의 자리에서 그는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또한 아시아 주교회의와 세계 주교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100만 신도가 운집하고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가 집전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회를 개최, 세계 최초로 교황청 밖의 시성식을 열어 한국의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으며, 1989년 10월 9일에는 교황과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가톨릭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적 행사인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103위 성인). 이 자리에서는 또한 헌혈, 안구·장기(臟器) 등의 기증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근본적인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만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북방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2002년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여 북한선교를 위해서도 애썼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에서 집전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하였고, 2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에서는 공동집전을 맡아 한국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200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오다가, 2009년 2월 16일 호흡 곤란과 혈압 저하로 인해 87세로 선종(善終)하였다. 빈소는 명동성당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닷새간의 일정으로 치러졌는데 이 기간에 시신이 유리관에 보관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20일 오전 가톨릭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교황특사 자격으로 장례미사를 집전한 뒤, 같은 날 오후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생명 연장만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당부함으로써, 산소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의 처치를 받지 않고 생을 마쳤다.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존엄사 논란은 물론, 국내 첫 존엄사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수술을 받았으며, 장례 절차 등도 '다른 신부와 달리 특별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추기경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다. 선종 이후 그를 추모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뜨거워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이 40만 명에 이르렀으며, 장기 기증 서약도 확산되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 공로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사회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등이 있다.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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