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왕조와 예루살렘의 종교질서
*당시 유대의 경제상황은 :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과
지배국의 수탈로 매우 빈곤한 상황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이런 유대 공동체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
역사적으로 하느님이 직접 거하시는 처소였고,
이 성전만이 전통성과 권위가 인정되었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은 :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유대 디아스포라의 순례로 이어졌고,
이들이 바치는 예물로 예루살렘만은
종교 산업으로 富를 축적했다.
*중요한 것은 : ①이 엄청난 규모의 제물들이 모두 성전에 귀속되어
몇몇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분배되었고,
②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권력과 富가 종교질서에 의해
분배되는 독특한 사회질서가 이루어졌다.
*이런 엄청난 利權이 보장되는 大제사장직은 :
①유대의 지배권자(시리아)에게 최종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②당시 지배권자였던 시리아는 매년 로마에 조공을 바치느라
재정이 극도로 궁핍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 점을 이용해 예루살렘 사람 야손은 :
BC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에게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았는데,
얼마 후(172년)에는 메넬라우스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더 많은 돈을 제시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받게 된다.
*메넬라우스는 : 시리아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성전의 재정을 유용해야 했는데(야손도 비슷),
야손은 :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백성들을 부추켜 폭동을 일으켰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서
시리아와 대립해 있던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얼마 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지만
야손과 메넬라우스 사이의 긴장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어
다시 폭동이 일어난다.
*이런 일련의 폭동사건으로 분노한 안티오쿠스 4세는 :
약탈과 대학살로 폭동을 진압한다.
그 뒤 시리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안티오쿠스 4세는 BC 167년 12월에 칙령을 발표해
유대인에게 강한 개화정책(헬라화)을 시행한다.
⇒이 개화정책은 :
①종교적인 행동을 금지하고,
②율법에 금지된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 했다.
③또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그리스의 神인 제우스를 경배하는데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모욕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종교 박해로 예루살람에서 약 10km 떨어진
모디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마카베오 항쟁).
그 결과 유대는 BC 142년 시리아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성경 공부합시다, 길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