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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와 예루살렘의 종교질서

윤 베드로 2014. 8. 6. 21:13

★셀레우코스 왕조와 예루살렘의 종교질서

 

*당시 유대의 경제상황은 :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과

        지배국의 수탈로 매우 빈곤한 상황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이런 유대 공동체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

          역사적으로 하느님이 직접 거하시는 처소였고,

        이 성전만이 전통성과 권위가 인정되었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은 :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유대 디아스포라의 순례로 이어졌고,

          이들이 바치는 예물로 예루살렘만은

                 종교 산업으로 富를 축적했다.

 

*중요한 것은 : ①이 엄청난 규모의 제물들이 모두 성전에 귀속되어

                          몇몇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분배되었고,

          ②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권력과 富가 종교질서에 의해

                          분배되는 독특한 사회질서가 이루어졌다.

 

*이런 엄청난 利權이 보장되는 大제사장직은 :

          ①유대의 지배권자(시리아)에게 최종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②당시 지배권자였던 시리아는 매년 로마에 조공을 바치느라

                 재정이 극도로 궁핍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 점을 이용해 예루살렘 사람 야손은 :

                BC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에게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았는데,

               얼마 후(172년)에는 메넬라우스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더 많은 돈을 제시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받게 된다.

 

*메넬라우스는 : 시리아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성전의 재정을 유용해야 했는데(야손도 비슷),

  야손은 :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백성들을 부추켜 폭동을 일으켰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서

                시리아와 대립해 있던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얼마 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지만

          야손과 메넬라우스 사이의 긴장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어

        다시 폭동이 일어난다.

 

*이런 일련의 폭동사건으로 분노한 안티오쿠스 4세는 :

        약탈과 대학살로 폭동을 진압한다.

          그 뒤 시리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안티오쿠스 4세는 BC 167년 12월에 칙령을 발표해

         유대인에게 강한 개화정책(헬라화)을 시행한다.

 

⇒이 개화정책은 :

①종교적인 행동을 금지하고,

②율법에 금지된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 했다.

③또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그리스의 神인 제우스를 경배하는데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모욕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종교 박해로 예루살람에서 약 10km 떨어진

          모디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마카베오 항쟁).

            그 결과 유대는 BC 142년 시리아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성경 공부합시다, 길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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