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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잊어버리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치자

윤 베드로 2021. 11. 5. 11:19

뭔가 잊어버리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치자

 

평균 연령이 70세에 달하는 지방의 한 교우촌 본당에서 오랫동안 준비한 순례가 있었습니다. 연령대가 높으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생기리라 각오를 하긴 했습니다만, 첫날부터 신부님과 함께 방을 돌아다니며 자매님들의 여행용 가방을 열어드리느라 저녁 시간을 다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설명회 때 비밀번호를 ○○○○에 맞춰놓거나, 바꾸시려면 꼭 수첩에 따로 적어 놓으시라고 부탁드렸는데. 바로 그 수첩을 가방 안에 소중히(?) 넣어두신 분들이 훨씬 더 많더라고요.

 

열 몇 개나 되는 가방을 겨우 열어드리고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에 묵주를 들고 빨간 내복만 입으신 채로 머리 곳곳에 헤어롤을 붙이신 자매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뒤를 따라 아래층 방으로 내려가 보니, 키를 놓고 방을 나와 다시 들어가지 못한 자매님 열 분 정도가 얼굴에 팩을 붙이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결국, 저희는 따로 마스터키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잠이 든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오랫동안 본당에 큰 역할을 하셨지만 최근에 치매증세가 나타난 분이 계셨는데, 모두가 찬성해서 순례에 함께하셨으나 아마 긴 비행으로 힘드셨나 봅니다. 신부님께서 금가락지를 훔쳐 간 걸 봤다며 화를 내시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신부님께서 기지를 발휘하셔서 저한테 깨끗이 닦아 달라고 부탁하셨잖아요? 내일 아침에 돌려드릴게요, 아셨죠?” 하며 두어 시간을 달래고 나서야 자매님은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다음 날 아침에는 지난밤의 일을 모두 잊으신 채 반가운 아침 인사를 건네셨지요.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순례 책자나 성가책, 안경과 미사보를 가져오지 않았다거나, 종이에 꽁꽁 싸매서 가져온 봉헌금을 찾지 못해 온 가방을 바닥에 쏟는 분들 덕분에 한바탕 작은 소란이 일었습니다.

 

그날 강론 시간에 신부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뭘까요?”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잘 크게 해주신 것”, “먹고 살 만큼 해주신 것”, “이만큼 건강하게 해 주신 것”, “순례에 올 수 있도록 해주신 것등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물론 그 모두가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선물은 아마도 잊어버리는 일, 망각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어젯밤에 여러 자매님이 비밀번호도 잊어버리고, 방 키를 가져오는 일도 잊어버렸어요. 한 분은 반지도 잃어버리셨고요. 조금 전에도 다들 난리더군요.”

 

한참이나 웃고 난 후에 신부님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나이가 들고 자꾸 잊어버리시니 속상하시죠?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우리 중에 남편을 하느님께 먼저 보낸 분도, 아들이 사고를 당해 먼저 세상을 떠난 분도 계십니다. 저는 그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슬픔을 잊지 않고 간직한다면, 우리가 남은 날들을 잘 살 수 있을까요? 평생 고생하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하고 보내시진 않았나요? 보증을 잘 못 서서 한순간에 집을 날리고 거리에 내쫓겼던 적도 있으시지요. 그 순간의 괴로움과 아픔을 매일매일 똑같이 겪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자꾸 잊어서 속상하신 걸 잘 압니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야 하는 것은 잘 잊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제 마음대로 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지요. 모든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씩 잊고 사는 것이 훨씬 큰 선물이에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인 거죠. 그러니 뭔가를 잊어버리면,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먼저 생각하세요.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자란 우리를 온통 사랑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몇 달 후 한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 스페인을 갔는지 스웨덴을 갔는지, 그도 아니면 스위스였는지를 몰라 서로 다투시던 순례단은 그래도 그날 강론은 모두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최근에는 이것저것 깜박하는 일이 잦아진 듯합니다. 우리의 가장 약하고 모자란 점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찾아내는 일 만큼은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평화신문 2021. 11. 7 / 미카엘의 순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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