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9 복음 묵상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의 묵상
증언을 한다는 것은, 증언할 대상에 대한 탐구나 분석이 아닙니다.
증언은 제 삶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린양”은 그런 외침을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입니다.
유다 사회가 간직한 “어린양”의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대속이었습니다
(탈출 12장; 이사 53장 참조).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유다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버거울 만큼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절망은 하느님을 통하여 희망을 꿈꾸는 것으로 바뀌고,
“어린양”은 미래에 펼쳐질 희망찬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오시는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합니다.
당시 사회는 세상을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 한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직접 주관하신다는 희망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은 세상을 단절시키고 갈라놓고 찢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오셨고(요한 13,1 이하),
당신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친교의 자리입니다.
증언을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사유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의 표상을 통하여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화합과 신뢰, 사랑임을 일깨웁니다.
화합과 신뢰, 사랑은 요한 복음이 쓰인 그 시대를 살아간 신앙 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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