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다(59,1-8)
유다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고,
그들이 하느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정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고, 모두 다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했다(59:4).
여기 이스라엘이 정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법이 바로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法은 한 공동체의 질서와 공동의 선을 위하여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따라서 법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질서와 공동의 善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그들의 범죄 행위는 독사가 알을 품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그 알이 밟혀 터질 때는
그 알로부터 독사가 나와서 자신과 이웃들이 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의 범죄 행위는 거미줄을 짜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짜낸 줄은 옷을 만들 수도 없는
즉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는 무익한 것이 되었다(59:5-6).
이처럼 그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모두 악한 것이었으므로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고, 그들 자신에게도 평안을 알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오직 황폐와 파멸만 있을 뿐이다(59:7-8).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평안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일지라도 죄 가운데 거한다면 평안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은 복된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 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가운데 거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죄의 길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망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에덴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망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앞에 열려진 수많은 축복의 길을 외면하고
파멸의 길로 행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죄의 고백(59,9-15)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한 재난들을 회고해 보며
그것들이 죄로 인하여 온 것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회개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은 범죄로 인하여 정의를 행함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잃어버렸다.
한 공동체가 정의를 행할 때 그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정의로부터 오는 축복을 공유할 수 있지만
부패로 인하여 정의를 상실하면 그로 인하여 오는 고통을 공유하게 된다.
본문에서 정의가 사라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을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빛을 바라건만 어둠만이 있고 광명을 바라건만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 대낮에도 캄캄한 듯 비틀거리고 ... (59:9-10).”
이런 표현들은 공동체가 부패했을 때 구성원들이 당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정의가 행하여 질 때
그것이 모두에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의 선이 무시될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공동체는 총체적으로 부패해 질 수밖에 없고,
또한 공동체가 부패해지면 구성원 전체가 고통을 받고
또한 자신이 공동의 선을 무시하며 얻은 이익까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공동체가 부패하여 공동의 善이 무너지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진다.
또 이스라엘은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잃어버렸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들을 돌아보며
그것들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죄를 회개하였다.
하느님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회복 시켜 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회개는 회복의 은혜로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은혜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회개는 우리를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나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의 오심(59,16-21)
하느님께서 회개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하여 주신 말씀이다.
여기 “그분께서는 한 사람도 없음을 보시고,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음을 보시고 놀라워하셨다.” 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에 전적으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는 전적으로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회개한 이스라엘의 중재자가 되어 주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7절, “그분께서는 정의를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다.
응보의 옷을 입으시고 열정을 겉옷처럼 두르셨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주는 말이다.
19절, “해지는 곳”이란 이방의 여러 나라들을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할 것이다.
또한 “주님의 바람으로 휘몰아치는 급류처럼 그분께서 오시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목격한 모습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회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마치 급히 흐르는 강물처럼 빈틈없으시고
누구도 그치게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20절, “구원자로 시온에 오시리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상실한 모든 것을 다시 회복 시켜 주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예언한 말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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