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정시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 주변의 강대국들의 침략과 정복 야욕을 방어하기에는
더 이상 부족동맹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이웃 민족들이 살아가는 왕정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①왕정제도가 도입되고 그 첫 왕으로는 사울이 추대되지만,
사울은 여러 가지 이유로 블레셋인들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실패하다가 결국 전사한 후,
②다윗이 남부지방 헤브론을 중심으로 그의 출신 부족인 유다 부족을 주축으로
베냐민과 시므온 부족을 규합하여 유다 왕국을 세운 뒤
북쪽의 사울 왕국에 편입되어 있던 10개 부족도 다윗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의 지배를 받기로 수락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통일왕정 국가로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는 기원전 1000년 조금 전의 일이었다.
③다윗은 : 블레셋인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아랍과 그외 인접국가들을 분쇄하면서
기반을 튼튼히 다져나가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천도하여
이곳에 야훼의 궤를 모셔 온다(2사무 5,6-6,15).
④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970-931년)은 :
국가 행정제도를 확립하고 잘 무장된 군대를 보유하면서,
현인(賢人), 건축가, 국제 무역인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하나,
통치말기엔 몇몇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도 한다(1열왕 3-11).
⑤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나
여로보암(에브라임 지파)이 반기를 들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분리 :
남쪽엔 유다 왕국, 북쪽엔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라진다(기원전 932년경).
⑥그때부터 약 200년 동안 남북 분단 시대가 시작된다. :
그 동안의 남북간 관계는 가끔 호전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양국간의 전쟁으로까지 악화되는 위기를 맞기도 한,
다소 분쟁이 심한 시대였다고 하겠다.
⑦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은 北이스라엘은 :
․ 새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긴 오므리, 아합 그리고 여로보암 2세 때 번영을 누리기도 했으나
․ 北왕국은 본래 분리주의라는 이념으로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도전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인지
정권의 정통성 결여는 거듭되는 불안정과 혼미로
결국 722년 아시리아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⑧남쪽의 유다 왕국은 :
․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적대국가들에 에워싸여 있어 그다지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외교정책에서도 이집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유다 왕국은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독립과 자주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아사, 여호사밧, 히즈키야시대엔 그나마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나
요시아(640-609)의 죽음을 기점으로 더욱 약세에 놓이게 된다.
․ 결국 앗시리아 제국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1차 597년, 2차 587년에 유다를 침공함으로써 유배시대가 펼쳐진다.
⑨유배시대는 : 역사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Is 역사중 가장 처절했던 시대였으나,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전개되는데,
즉, 새로운 눈으로 지나간 과거 역사를 되돌이켜 보고
그 안에서 이루어주신 하느님의 업적을 상기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신앙의 쇄신을 기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많은 성서 전승들이 수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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