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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윤 베드로 2014. 8. 24. 10:12

☆알렉산드리아

 

*오늘날의 알렉산드리아는 : 인구 4백만 명이 넘는 이집트 지중해변 항구도시.

 

*알렉산더 대왕은 : 기원전 331년 이집트 델타 동부에 새 항구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했다.

기원전 323년 대왕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사망한 다음에는

그의 막료 프톨레마이오스 1세 장군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이집트를 통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이

            자살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여기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만을 보도록 하겠다.

․유다인들은 : 기원전 6세기부터 이집트로 이주했는데,

      알렉산드리아 항도가 건설되자 초창기부터 거기로 모여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철학자 필로(기원전 20년경-서기 50년)에 따르면

  자기 시대에 1백만 명도 넘는 유다인들이 이집트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알렉산드리아에 살았음에 틀림없다.

 

․서기 38년 이집트인들이 유다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비극이 벌여졌다.

․66년 팔레스티나에서 제1차 유다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들도 봉기했다가 진압 당했고,

     115-117년에 재차 봉기했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공동체가

     거의 해체되었다.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

․4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415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루스가

       유다교 공동체를 괴멸시켰다.

․알렉산드리아 유다교 공동체의 가장 큰 업적은 :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번역본을 "70인역"이라고 하는데,

번역과정에 대한 전설은 : 서력 기원 전후해서

       어떤 이가 가명으로 쓴"아리스테아 편지"에 적혀 있다.

역사비평학적으로 볼 때 70인역은 : 여러 역자들이

        알렉산드리아와 기타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중 오랜 시일에 걸쳐 번역한 경전이다.

70인 역에는 : 히브리어 구약성서 이외에도

         가톨릭 구약성서 목록에서 이른바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11-16장, 마카베오 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3장 일부와

                     13-14장이 들어 있다.

대략 서기 40년경부터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입교함과 더불어

        이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70인 역을 사용했고,

        이렇게 해서 70인 역이 자연스레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가 되었다.

 

․교부들 가운데서 70인 역본 이외에 구약성서 기타 그리스어 역본들과

       히브리어 원문에 관심을 지닌 교부는

       오리게네스(185-245년경)뿐이었다.

      구약성서 라틴어 역본들도 모조리 70인역에서 중역한 것이다.

      예로니모(342-420년경)가 처음으로 베틀레헴에서

      구약성서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직역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 아폴로가

        1세기 중엽에 에페소와 고린토에서 활약했으나(사도 18,24-28),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입교했다는 증거는 없다.

․마르코 복음 사가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전혀 믿을 바 못된다.

․지중해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일찍부터 평신도들이 자연스레 그리스도교 교리학당을 세웠다.

 

․성서를 자의적으로 풀이한 안티오키아 신학파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 신학파는 우의적으로 풀이했다.

      성서에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심오한 뜻,

      곧 상징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의적 해석 방법은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들(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이

            신화와 우화를 풀이할 때 즐겨 쓰던 방법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다교 철학자들도

         이 방법을 애용했는데, 특히 필로가 그랬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교리학당은

                         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클레멘스가 우의적 해석을 즐겼고

                  오리게네스는 이 해석을 체계화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두드러진 이들은 :

        데메트리우스 1세(188-230년 재위),

   디오니시우스(246-264년 재위), 페트루스(311년 순교),

   아타나시우스(328-373년 재위), 테오필루스(385-412 재위),

   키릴루스(412-444년 재위), 디오스코루스(444-454년 재위) 등이다.

 

⇒이들 알렉산드리아 주교들은 : 이집트를 통괄하고 대표하는 이들로서

       대주교, 총대주교, 교황(그리스어로 Papas)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수세기에 걸쳐 로마 주교, 안티오키아 주교,

       콘스탄티노플 주교와 우위를 다투면서 자기네 세력을 확장하는데 전력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께는 신성과 인성 두 성품이 있었다는

          양성론을 정통 교리로 의결하자,

          단성론을 주창하던 이집트 교회는 차츰차츰 이탈해서 콥트 교파가 되었다.

⇒1997년 현재 이집트의 콥트 그리스도인들은 6백만 명 남짓하다.

               이와는 달리 양성론을 지지하는 교파를 멜키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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